선운사 백파율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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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백파율사비
Stele of Preceptor Baekpa at Seonunsa Temple
선운사 백파율사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선운사백파율사비
영문명칭 Stele of Preceptor Baekpa at Seonunsa Temple
한자 禪雲寺 白坡律師碑
지정(등록) 종목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2호
지정(등록)일 1986년 9월 9일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선운사 백파율사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2020 국문

선운사 백파율사비는 1858년(철종 9년)에 세운 것으로,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글을 짓고 글씨를 썼다. 선운사 부도전(浮屠田)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체 높이 2.36m, 비신 높이 1.4m. 1858년(철종 9)에 건립되었다. 비문의 글씨는 방정한 해서체의 글씨로서 추사가 별세하기 1년 전에 쓴 글씨로서 추사체의 진면목이라고 일컬어진다. 비문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근세에 율사(律師)의 종파가 없었는데, 오직 백파(白坡)만이 이에 해당할 만하며, 대기(大機)와 대용(大用)은 백파가 팔십 년 동안 착수하고 힘을 쏟은 분야이기 때문에 비문의 제목을 ‘화엄종주 백파대율사 대기대용지비(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之碑)’라고 하였다고 한다.

또 백파의 비석에 새길 글자에 ‘대기대용(大機大用)’이라는 한 구절을 큰 글씨로 특별히 쓰지 않는다면 백파의 비(碑)로서 부족할 것이기에 이렇게 써서 설두(薛竇)와 백암(白巌) 등 백파의 여러 문도(門徒)에게 보인다고 하였다.

백파율사는 조선의 억불 정책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 불교의 참신한 중흥을 일으킨 화엄종주이다. 이와 같은 백파율사의 업적을 김정희가 찬양한 내용이 적혀 있는 선운사 백파율사비는 추사의 글씨체 연구와 율사의 업적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2021 국문

선운사 백파율사비는 조선시대 스님인 백파율사 긍선(亙璇, 1767-1852)을 기리려고 1858년에 세워졌다. 비문은 백파율사와 어울렸던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가 직접 글을 짓고 글씨를 썼다.

백파 긍선은 고창 무장 출신으로, 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대원군의 10대손이다. 12세에 선운사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조선 후기 수선결사修禪結社로 불교를 중흥하려던 화엄종의 대가이다. 백파가 60세 때1826 선종 종파들의 특징을 자신의 논리로 밝힌 ‘선문수경’禪文手鏡을 짓자, 해남 대흥사의 초의선사와 추사는 편지로 백파와 논쟁하였다. 특히, 1843년에 추사는 ‘백파망증 15조’白波妄證 十五條에서 15가지를 근거로 백파의 논지가 잘못되었다며 신랄한 표현으로 백파와 그 제자들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이후 백파와 초의의 제자들이 100여 년 동안 논쟁하였다. 백파가 입적한 지 3년 뒤인 1855년 그 제자들의 부탁으로 추사는 비문을 써 주었으며, 3년 후인 1858년에 선운사로 보내져 지금의 백파율사비가 세워졌다. 비문은, 앞면에 웅장하고 장엄한 해서로 “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之碑”화엄종주 백파대율사 대기대용지비라고 쓰여 있고, 뒷면에 활달하고 자유분방한 추사체 행서로 백파의 업적을 기술하였다. 이것은 추사가 별세하기 1년 전에 쓴 글씨로서 추사체의 진면목이라고 불린다. 추사가 백파율사의 업적을 직접 쓴 이 비는 조선 후기 불교를 중흥시킨 백파율사 연구와 추사체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2020 영문

Stele of Preceptor Baekpa at Seonunsa Temple

This stele was erected in 1858 to honor the Buddhist monk Geungseon (Preceptor Baekpa, 1767-1852).

Born in Gochang, Geungseon was a 10th-generation descendant of Deokheung Daewongun (1530-1559), the 7th son of King Jungjong (r. 1506-1544). He was ordained as a monk in 1784 at Seonunsa Temple. Later, he visited many eminent masters of Korean Seon Buddhism and devotedly followed the teachings of the Buddha. Beginning in 1792, he taught students for over 20 years at Unmunam Heritage of Baegyangsa Temple. In 1815, he came to the realization that the true teaching of Buddha cannot be found in the writings and should be pursued through attaining wisdom. So, Geungseon stopped teaching and dedicated himself to the meditative practices of worship. In 1826, Geungseon wrote a book called Hand Mirrors of Seon Practice (Seonmun sugyeong) that discussed the main principles of Seon Buddhism, which led to an unprecedented doctrinal debate within Korean Buddhism.

The stele consists of a square pedestal, a body stone, and a capstone. The text of the inscription was composed and calligraphed by a close friend of Monk Geungseon, the civil official and calligrapher Kim Jeong-hui (1786-1856), in 1855. The inscription begins with words of admiration for Preceptor Baekpa, stating “It has been a long time in our land since a preceptor established a school of his own as Preceptor Baekpa has done.”


      • I added the new sentence and changed the previous one a little bit to accomodate it :

The text of the inscription was composed and calligraphed in 1855 by a close friend of Monk Geungseon, the civil official and calligrapher Kim Jeong-hui (1786-1856), one year prior to his own death. Therefore, this inscription is regarded as a true example of Kim’s authentic handwriting.

영문 해설 내용

  • 기존 영문 그대로. 아래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만 추가.

이 비는 조선시대의 승려인 백파율사 긍선(1767-1852)을 기리기 위해 1858년에 세워졌다.

긍선은 고창 출신으로, 중종(재위 1506-1544)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대원군(1530-1559)의 10대손이다. 1784년 선운사에서 출가하여 계를 받았으며, 여러 선승들을 찾아다니며 수행하였다. 1792년 백양사 운문암에서 처음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강의하기 시작하였고, 20년 이상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1815년에는 진정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문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체득하는 데 있음을 깨닫고, 강의를 그만두고 참선에 몰두하였다. 1826년에는 선문의 요지를 논한 『선문수경』을 저술하였는데, 이 책은 당시 불교계에 가장 치열한 교리 논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탑비는 네모난 받침돌, 몸돌, 지붕돌로 이루어져 있다. 비문은 평소에 교유가 깊었던 문신이자 서화가인 김정희(1786-1856)가 1855년에 짓고 글씨를 썼다. 김정희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쓴 글씨로, 그의 글씨체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여겨진다. 비문의 첫부분은 “우리나라에는 근래에 율사로서 일가를 이룬 이가 없었는데 오직 백파만이 여기에 해당할 수 있다.”로 시작하여, 백파율사에 대한 존경을 표현하고 있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