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암초당
두암초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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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두암초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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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斗巖草堂 |
지정(등록) 종목 | 고창군 향토문화유산 제10호 |
해설문
국문
두암초당은 부모를 여의고 시묘살이를 했던 호암 변성온(壺巖 卞成溫, 1530~1614)과 인천 변성진(仁川 卞成振, 1549~1623) 형제의 지극한 효성을 기억하려고 후손들이 지은 정자이다. 초당 가까이에 부모 묘소가 있다. 변성온은 하서 김인후의 제자로 퇴계 이황과도 교유한 성리학자이다.
초당은 전좌암 또는 두락암*(斗絡巖)이라 불리는 바위 밑을 조금 파고 그 안에 구조물을 끼워서 지은 보기 드문 바위굴 누정이다. 창건 이후 훼손되었으나 5대손인 변동빈이 1815년에 중건한 후 여러 차례 고쳐 지었다. 초당에는 이재 황윤석, 노사 기정진 등 이름난 인물들의 시, 현판, 중건기 등이 남아 있다.
건물 지붕은 옆에서 볼 때 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고, 평면은 앞면이 3칸, 옆면이 1칸이다. 가운데 작은 온돌방을 들이고 3면에 마루를 깔아 병바위 등 주변의 수려한 풍광을 즐기도록 하였다. 이곳은 김소희 명창이 득음하였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 두락암: 곡물의 양을 재는 도구인 말(斗)를 엎어놓은 형태의 바위
영문
영문 해설 내용
두암초당은 변성온(1530-1614)과 변성진(1549-1623) 형제를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지은 정자이다. 언제 처음 지었는지는 알 수 없고, 형제의 5대손인 변동빈이 1815년에 중건한 건물이 오랜 세월에 유실되어, 1954년 지금의 건물을 다시 지었다.
변성온은 뛰어난 학자였던 김인후(1510-1560)의 제자이며 이황(1501-1570)과도 교유한 성리학자이다. 변성진은 김인후와 이황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학행으로 이름이 높아 관직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서 은거하였다. 두 형제는 효성이 지극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부모님의 묘소에서 시묘살이를 했다고 한다.
초당은 바위 밑을 조금 파고 그 안에 건물을 끼워서 지은 독특한 구조이다. 가운데에 작은 온돌방을 들이고 주변 3면에 마루를 깔았으며, 주변의 수려한 자연 풍광을 즐길 수 있도록 하였다. 초당 안에는 이름난 학자와 서화가들이 이곳을 방문하여 남긴 시와 중건기 등이 적힌 현판들이 걸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