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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전 백이정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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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전 백이정 묘
남해 전 백이정 묘,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남해 전 백이정 묘
주소 경상남도 남해군 남면 평산리 54
지정번호 경상남도 기념물 제155호
지정일 1996년 3월 11일
분류 유적건조물/무덤/무덤/기타
시대 고려시대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남해 전 백이정 묘,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이 돌무덤[石塚]은 고려 말의 대학자인 이재(紛齋) 백이정(白頤正, 1247~1323) 선생의 묘라고 전해져 오고 있다. 그러나 기록이 없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그 사실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 설령 선생의 묘라 하더라도 어떤 연유로 이곳에 선생의 묘가 세워졌는지 정확한 사연을 알 수 없다. 선생이 살았던 당시는 원(元)나라의 간섭이 심했던 시기로, 부자간에도 왕위쟁탈전이 벌어질 정도로 혼란이 극심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 남해 지방으로 왔다가 죽은 뒤에 이곳에 묻히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다만 이 곳의 돌무덤과 주변의 돌담이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돌담 쌓기 양식인 엇물림식 돌쌓기로 되어 있어, 고려시대 사람의 묘라는 것은 분명하다. 선생은 안향(安珦)의 문인(門人)으로, 1298년(충렬왕 24)에 원나라에 들어가 10년 동안 머물며,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안향이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들여왔다고 한다면, 그것을 본격적으로 연구하여 크게 활성화시킨 사람이 바로 선생이었다. 이처럼 안향에게서 선생한테 전해진 우리나라 성리학은 이후 이제현(李齊賢), 박충좌(朴忠佐)를 통해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에게 전해지고, 다시 조선의 권근(權近)과 변계량(卞季良)에게 이어졌다. 현재 남해군 이동면 난음마을에 있는 난곡사(蘭谷祠)에는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수정 국문

초고

1차 수정

문맥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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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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