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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 응와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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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 응와종택
성주 응와종택,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성주 응와종택
한자 星州 凝窩宗宅
지정번호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44호
지정일 1983년 6월 20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일곽
웹사이트 성주 응와종택,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응와종택은 조선 경종 1년(1721) 이이신이 터를 잡고 이이신의 손자인 이민겸이 규모를 늘렸다. 여러 차례 고쳤으며 1910년에 사당을 덧붙여 늘려 지었다. 2010년 이후 자혜당, 부속채, 화장실 등을 새로 만들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안채, 사랑채, 사당, 북비채, 행랑채 등 모두 9동으로 이루어졌다. 응와종택이라는 이름은 사랑채를 완성한 응와 이원조(李源祚)의 호에서 따왔다. 북비고택(北扉古宅)은 응와종택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이신의 아들인 이석문(李碩文)이 사도세자가 죽은 뒤 세자를 그리워하여 영조 50년(1774)에 북쪽으로 대문을 만들었다고 하여 지은 이름이다.

이석문은 영조 15년(1739)에 무과에 급제하여 사도세자를 곁에서 보호하고 지켰다. 영조 38년(1762)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려 하자 이석문은 세손을 등에 업고 말리는 수문장을 밀치고 들어가 세손이 영조에게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눈물로 호소하게 하였다. 이 일로 이석문은 관직을 빼앗기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뒤 영조가 다시 벼슬할 것을 명하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고 대문을 북쪽으로 돌려내고 사도세자를 그리워하였다. 그의 손자인 이규진이 정조 7년(1783) 과거에 합격하자, 정조는 이규진을 특별히 불러 “너의 조부가 세운 공이 가상하다.”하고, 또 “북쪽 대문이 아직도 있는가?”라고 물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