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 영사재
합천 영사재 |
|
대표명칭 | 합천 영사재 |
---|---|
한자 | 陜川 永思齋 |
주소 | 경상남도 합천군 화양안성길 126-19 (묘산면, 영사재) |
지정(등록) 종목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23호 |
지정(등록)일 | 2002년 8월 14일 |
분류 |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
시대 | 조선시대 |
수량/면적 | 2동(1,170㎡) |
웹사이트 | 합천 영사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
해설문
국문
파평윤씨의 화양동 입향조 사제공 윤장(尹將) 선생을 기리기 위해 문중과 유림에서 성금을 모금하여 지은 재실로, 상량문에 의하면 17세기경에 건립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1907년 중수하였다. 윤장 선생은 문과에 급제하여 사제판사(司帝判事)를 지내던 중 1453년(단종 원년)의 계유정난(癸酉靖難)을 피하여 낙향하여 화양동에 은거하면서 강학하였다.
영사재는 산의 사면부에 남동향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경사지형을 정지하여 거의 평지에 가깝게 조성하였다. 1칸의 대문채와 재실을 일직선상에 배치하고, 사면에 담장을 둘렀다. 재실은 정면 5칸, 측면 1.5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이다. 입향조를 위한 재실로 역사적 가치가 충분하며, 치목 수법 및 퇴칸의 사용이나 소로장식 기법 등 조선 후기 건축의 양식과 기법을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영사재는 파평윤씨의 이 마을 입향조인 윤장을 기리기 위해 문중과 지역 유림이 성금을 모아 지은 재실이다.
윤장은 1453년 문종(재위 1450-1452)의 동생인 세조(재위 1455-1468)가 조카 단종(재위 1452-1455)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으려 자신의 반대 세력들을 없애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은거하며 강학에 힘썼다고 한다.
경사지를 평지에 가깝게 다듬은 후 지어진 이 건물은 17세기 무렵 처음 세워졌다고 하며, 지금의 건물은 1907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재실은 중앙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두었으며, 대청 뒤쪽에는 판벽을 세웠다. 전면에는 툇마루를 달았는데, 동쪽은 단을 올려 조금 더 높게 만들었다.
뒤쪽 처마의 돌출 길이가 더 긴 것은 본래 건물 뒤쪽에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진 벽장 공간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 자료
- 지자체 제공 조사자 의견 중 -> 맨 좌측칸의 방과 우측칸의 방 배면에는 원래 벽장이 시설되었으나 지금은 없어진 상태이다. 대청의 뒷벽은 판벽으로 하고 쌍여닫이 판문을 달았다. 측면에는 문을 내지 않았다. 특이한 점은 처마의 돌출길이가 정면보다 배면이 40㎝ 정도 더 길다는 점이다. 아마 지금은 없어진 벽장까지를 보호하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 존재를 알리고 싶지 않은 듯, 키 작은 굴뚝, 오마이뉴스, 2018.4.29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27830 -> 먼저 540여 년 전, 윤장이 화양마을에 몸을 숨겼다. 파평윤씨 14세손으로 1380년 고려문과에 급제했으며 조선 문종 대에 사재판서(司宰判書)를 지냈다. 윤장은 김종서의 장인, 윤원부의 종형제로서 김종서(1383-1453)가 1453년 계유정난으로 희생되자 화를 피해 들어왔다.
- 파평 윤씨의 화양동 입향조 재실 영사재, 봐도 잊어버리고, 다음 블로그 http://blog.daum.net/duddnr1052/387 -> 2012년 사진. 대청 판벽 사진 상세.
- (참고) 야천 선생의 외가 이야기 http://bannampark.org/bbs/zboard.php?id=guest2&no=580 -> 먼저 윤장의 합천입향 배경과 시기를 생각해 볼 때 합천 화양윤문의 가승(家乘:집안에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수양대군[세조]의 계유정난(1453년10월) 때 피화된 좌의정 김종서(金宗瑞)의 4촌처남이던 윤장이 화를 피하기 위해서 낙남(落南)했다고 한다. 여기서 윤장이 김종서의 4촌처남이라는 것은 약간 잘못 전해진 것이고 사실은 김종서의 장인 윤원부(尹元富)의 4촌동생이다. 그런데 아무튼 이러한 주장에는 약간의 의문이 있다.
윤장의 인적사항과 생졸년도는 자세하지 않으나 그가 1380년(우왕6년) 고려문과에 급제했으며 사재판사(司宰判事)를 역임했다는 기록이 있다. 윤장의 슬하에는 5명의 아들과 10여명의 손자들이 있었는데 세대간 나이차를 30년으로 감안하면 당시 막내손자 윤자선의 나이도 청장년기에 해당한다. 따라서 윤장이 계유정난 때 낙남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 윤장의 고려문과방목에 장인은 정검(鄭儉)[본관미상]이고 외조부는 김분(金賁)[본관미상]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합천은 윤장의 처가이거나 처외가이며 그리고 여말선초 혼란기에 미리 합천에 별업을 조성하고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서 세거지로 삼았을 가능성이 있다. 즉 윤장과 그 식솔들은 한양과 합천을 오가며 생활하다가 윤장이 말년에 합천으로 완전히 입향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