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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박소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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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박소 신도비
합천 박소 신도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합천 박소 신도비
한자 陜川 朴紹 神道碑
주소 경남 합천군 묘산면 화양리 산53-4번지
지정(등록) 종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01호
지정(등록)일 1994년 7월 4일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합천 박소 신도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조선 중종 때의 문신이며 성리학자인 야천(冶川) 박소(朴紹, 1493~1534)의 신도비로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590년(선조 23)에 세웠다.

선생은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1519년(중종 14)에 문과(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한 후 수찬(修撰), 사서(司書), 필선(弼善) 등을 역임하면서 신진사류(新進士類)들과 함께 왕도정치의 구현을 위해 노력하였다. 사간(司諫)으로 있을 때 훈구세력들에 의해 파직되어 외가가 있는 합천으로 내려와 학문에 전념하였다. 사후에는 영의정으로 추증(追贈)되었고, 문강(文康)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비신(碑身)은 높이 205㎝, 폭 93㎝, 두께 30㎝이다. 비문은 사암(思菴) 박순(朴淳)이 짓고, 글씨는 석봉(石峯) 한호(韓濩)가 썼다. 1993년에 반남(潘南) 박씨 문중에서 비각을 세워 비석을 보호하고 있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이 비는 조선시대의 성리학자 박소(1493-1534)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1590년에 세워졌다.

박소는 1519년 과거에 급제했으며, 사간으로 활동하다가 파직된 후 고향인 합천으로 내려와 학문에 전념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비석은 거북 모양의 받침돌 위에 몸돌을 세우고, 지붕 모양의 머릿돌을 올린 형태이다.

비문은 박순(1523-1589)이 지었고 글씨는 한호(1543-1605, 호 석봉)가 썼다.

지금은 1993년 문중에서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지은 비각 안에 자리하고 있다.

  • 사간으로 활동하다가 파직된 후 -> 박순은 김굉필의 문인이며, 조광조 등과 함께 왕도정치 구현을 위해 노력했으나, 훈구파를 탄핵하다가 그들의 미움을 사 도리어 파직당하게 되었다.
  • 고향인 합천으로 내려와 -> 지자체 국문에 ‘외가’로 되어 있으나, 마을에 반남 박씨 중종 묘역이 형성되어 있고 반남 박씨가 이 마을에 고려시대부터 세거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언급한 ‘고향’이라고 써도 무방할 듯함.

참고 자료

  • [경남]2019, 老巨樹[1] - 8. 박소 신도비, 생에 대한 진한 애착,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jvj24601/221677071042 -> 사진 상세 / 신도비가 서 있는 마을에 반남 박씨 종중 묘역이 형성되어 있다. 맞은편 언덕에 박소의 묘가 있다.
  • 한석봉이 쓴 박소 신도비명과 심소정, 조찬용 합천사랑, 다음 블로그 https://blog.naver.com/antlsguraud/221541901555 -> 신도비 내용, 신도비 기준 묘역 및 재실 위치 확인 가능
  • 합천 박소 신도비 (陜川 朴紹 神道碑), 들꽃-문화재 다 모여라,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hyeng19/220955968550 -> 제액은 이항복의 글씨이다. - 확인 한번 더 필요(여기에서만 언급된 내용이라 적지 않음.)
  • 11대 나의 자랑스런 반남박씨<나의 직계 선조이신 문강공 야천 박소이야기>, 자랑스런 반남 박씨,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log-home/221912138261 -> 관련 인물 정보들 일람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