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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쌍충 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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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쌍충 사적비
진주 쌍충 사적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진주 쌍충 사적비
한자 晋州 雙忠 事蹟碑
주소 경남 진주시 본성동 500-1번지
지정번호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호
지정일 1972년 2월 12일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진주 쌍충 사적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쌍충사적비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활동한 제말(諸沫)과 그의 조카 제홍록(諸弘祿)의 공적을 함께 새긴 비석이다. 한 집안의 두 충신이라는 뜻에서 쌍충(雙忠)이라고 하였다.

제말은 의병을 일으켜 웅천, 김해, 의령 등지에서 왜적과 싸워 전공을 세웠다. 성주 목사에 임명되었으나 왜군과의 전투에서 사망하였다. 조카 제홍록은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연로한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숙부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웅해, 정암진, 진양의 싸움에서 공을 세우고 1597년 정유재란 때 왜적과의 전투 중에 사망하였다.

정조 16년(1792)에 촉석루 옆에 비를 세우고 비각을 지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헐리어 방치되어 있던 것을 1961년에 다시 원래의 자리에 비석을 세우고 비각을 지었다.

서유린이 글을 짓고 이병모가 글씨를 썼으며 조윤형이 비문의 제목인 두전(頭篆)을 썼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활약한 제말(1552-1593)과 그의 조카 제홍록(1558-1597)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석이다.

제말은 전쟁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경상남도 일대의 왜적을 물리치는 전공을 세웠으며, 성주성 전투에서 사망했다. 제홍록은 숙부를 따라 의병으로 활약했으며, 1597년 정유재란 때 전사했다.

비석은 거북 모양의 받침돌 위에 몸돌을 올리고, 용과 국화로 장식한 머릿돌을 올린 형태이다. 왕명에 의해 1792년 비각과 함께 처음 세워졌다.

비문은 당시 이조판서였던 서유린(1738~1802)이 지었으며, 글씨는 이병모(1742-1806)가 썼고, 조윤형(1725-1799)이 두전을 썼다. 비석의 이름은 한 집안에서 두 명의 충신이 나왔다는 뜻에서 ‘쌍충’이라고 하였다.

진주성 안에 세워져 있었던 이 비석은 일제강점기 때 비각이 헐리면서 길가에 방치되어 있었는데, 1961년 지금의 위치에 비각을 짓고 비석을 옮겨왔다.

  • 제말 생몰년 관련 - 현재 민백 기준이나 생년 미상인 경우도 있고(?-1592), 생년이 10년 이상 차이나는 경우도 있어(1567-1593) 확인 필요함.
  • 비문에는 두 제씨의 풍모(風貌)와 집안 내력, 공적(功績)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고, 그 들의 공을 칭송한 남구만(南九萬) 등의 말도 수록하고 있다.
  • 제말은 의병으로 공을 인정받아 성주목사로 부임했다가 전사했다. 제홍록은 이순신의 휘하에서 활약했으며, 정유재란 때 왜군에게 포위된 진주성을 지원하기 위해 출정하던 길에 적을 만나 전사했다.
  • 쌍충사적비는 성주에도 있는데(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61호), 정조가 1792년에 진주와 성주에 ‘쌍충각’이라는 비각과 함께 세우게 한 것이다. (국가문화유산포털 2 참조)

참고 자료

  1. 제홍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A0%9C%ED%99%8D%EB%A1%9D&ridx=0&tot=703
  2. 제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A0%9C%EB%A7%90&ridx=0&tot=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