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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우곡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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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우곡정
진주 우곡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진주 우곡정
한자 晉州 隅谷亭
주소 경남 진주시 사봉면 우곡길 79-34
지정(등록) 종목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65호
지정(등록)일 1983년 7월 20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조경건축/누정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진주 우곡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우곡정은 고려 말에 우곡 정온(鄭溫)이 태조의 역성혁명(易姓革命)을 반대하여 숨어 지내던 곳이다.

우곡정은 1393년(태조 2)에 우곡 정온이 이곳에 지내기 위해 지은 정자로 1849년(헌종 15)에 보수하는 등 여러 차례 고쳐 짓다가 다시 지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고려 말 대사헌을 지낸 정온이 새 왕조인 조선에 협력하지 않자 태조가 사위 이제(李濟)를 보내 초빙하였으나 왕명을 거역하지 못하고 눈뜬 봉사라는 핑계로 거절하였다고 한다.

이때 이제가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솔잎으로 눈을 찔렀더니 눈동자는 움직이지 않고 피가 흘렀다고 한다.

이러한 정온의 절의를 기려 출입문에 절의문(節義門)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윤보선 대통령의 글씨이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고려 말 문신 정온(1324-1402)이 은거하면서 만든 정자이다.

정온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고려 왕조에 대한 절의를 지키고자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장님’을 자처하며 은둔하였다.

건물은 1393년 처음 지어져 1849년에 고쳐 지었으며, 1976년에 보수하였다.

중앙에 대청이 있고 좌우에 온돌방을 두었으며, 아궁이는 건물 뒤쪽에 시설하였다. 온돌방 전면에는 난간을 두른 툇마루를 달았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태조가 정온을 초빙하기 위해 사위인 이제를 보냈는데, 정온은 자신이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하였다. 이제가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뜰에 있던 솔잎을 뜯어 그의 눈을 찔렀더니 눈동자는 가만히 있고 피만 흘렀다. 태조는 그 이후로 정온을 다시는 찾지 않았다고 한다.

  • 대문 밖에는 그가 낚시했다는 연못이 남아있으며, 연못 중앙에 몸 하나에 머리가 세 개인 돌거북이 있다. -> 거북의 머리가 세 개인 이유, 거북상이 언제 세워졌는지 등은 알 수 없음.

참고 자료

  • 우곡정, 디지털진주문화대전 http://www.jinju.go.kr/02232/02830/02248.web?amode=view&idx=250 ->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3량 구조(三樑構造)로 팔작지붕이다. 중앙 어칸(御間)에 대청이 있고 좌우에 방이 있는 평면이다. 전면 뒷마루에는 계자난간(鷄子欄干)으로 둘러진 누(樓)마루 형식이지만 지면에는 그리 높지 않고, 아궁이는 배면(背面)에 있다. 그리고 대문 밖 앞뜰에는 낚시하던 못이 거의 원형(原形)으로 보존되어 있다.
  • 청맹(靑盲)을 핑계로 이성계의 부름을 피한 정온(鄭溫), 경남미디어, 2019.8.23 http://www.mediag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48 -> 고려 말 이성계가 혁명을 일으켜 조선을 건국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여 두문동과 지리산 청학동에 은거 수양하다가 진주로 낙향하여 우곡정을 짓고 말년을 보냈다. 우곡은 정자 앞뜰에 못을 파고 주위에 백일홍 나무를 6그루 심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을 지켜 은둔생활을 하였는데 태조(太祖)가 사위 이제(李齊)를 이곳까지 보내어 초빙하였으나 차마 왕명(王命)을 거역치 못하여 눈을 뜬 봉사가 되었다고 거짓 핑계로 사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