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의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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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의암
진주 의암,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진주 의암
한자 晋州 義巖
주소 경남 진주시 논개길 16 (본성동)
지정(등록) 종목 경상남도 기념물 제235호
지정(등록)일 2001년 9월 27일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순절지
시대 시대미상
수량/면적 400㎡
웹사이트 진주 의암,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의암은 의기(義妓) 논개(論介)가 임진왜란 진주성전투에서 성이 왜군에 무너졌을 때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져 죽은 바위이다.

논개의 죽음이 있기 전에는 이 바위를 위험한 바위라 하여 ‘위암(危巖)’이라 불렀다가 논개의 죽음이 있고나서 진주 사람들은 이 바위를 의(義)로운 바위라 하여 의암이라고 불렀다.

바위의 서쪽 면에는 1629년(인조7)에 진주고을 선비 정대륭(鄭大隆)이 의암이라는 글씨를 새겼고, 남쪽 면에는 진주고을 선비 한몽인(韓夢寅)이 썼다고 전하는 의암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이 바위는 논개가 1593년 2차 진주성 전투로 성이 함락된 후, 왜장을 유인해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진 자리로 전해지며, 촉석루 아래에 있다.

과거에는 위험한 바위라는 뜻의 ‘위암’이라고 부르다가, 논개가 순국한 후 그녀를 기리고자 ‘의로운 바위’라는 뜻의 ‘의암’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629년에 진주 지역의 선비 정대륭(1599-1661)이 바위 서쪽 면에 글씨를 새겼다. 남쪽 면에 있는 글씨는 진주 출신의 선비 한몽삼(1598-1662)이 쓴 것이라고 전한다.

진주 지역에는 이 바위가 암벽 쪽에 붙으면 나라에 어려움이 생긴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오고 있다.

건너편에 논개의 행적을 기리며 세운 의암사적비가 있다.

  • 옆의 암벽에는 “한 줄기 긴 강이 띠를 두르고, 의열은 천년의 세월을 흐르리라(일대장강(一帶長江) 천추의열(千秋義烈))”는 글이 새겨져 있다. (국가문화유산포털 설명 중)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