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대성동 고분군 73호분

HeritageWiki
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0년 11월 7일 (토) 21:00 판 (새 문서: {{개별안내판 |사진= |사진출처= |대표명칭=김해 대성동 고분군 73호분 |한자= |영문명칭= |종합안내판=김해 대성동 고분군 |위도= |경도= }} =...)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김해 대성동 고분군 73호분
Goto.png 종합안내판: 김해 대성동 고분군



해설문

국문

김해 대성동 고분군 73호분은 애구지 언덕 남동쪽 비탈에 위치한 5세기 후반의 돌덧널무덤*이다. 무덤의 규모는 길이 4.8m, 너비 1.9m로, 대성동 고분군에서 조사된 돌덧널무덤 중 가장 큰 무덤이다.

돌 덧널은 다양한 크기의 돌을 사용해서 만들어졌으며 그 사이에 생긴 틈새는 점토로 채웠다. 73호분은 애구지 언덕 남동쪽으로 완만하게 낮아지는 비탈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북쪽이 남쪽보다 깊이 파여 있다. 돌 덧널 벽 위에 뚜껑돌 3장을 덮었으며 뚜껑돌 사이는 사람 머리 크기만 한 돌을 깨부수어 채웠다. 벽면 아래에서는 돌벽을 쌓거나 버티기 위한 나무 구조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대부분 도굴되어 사라졌지만 무덤 주인이 지배층이었음을 나타내는 금동 관 일부와 금 귀걸이, 금동제 화살통, 큰 칼의 은제 장식 등이 출토되었다. 토기는 부산 복천동 53호분 출토품과 비슷하며 금관가야의 토기 형식과 함께 경산ㆍ창녕ㆍ진주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토기 형식들도 있다.

대성동 고분군의 가장 큰 돌덧널무덤이지만 다른 가야 지역의 대형 무덤과 차이가 나고 딸린덧널이 설치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금관가야 쇠퇴기의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금동 관이 함께 묻혀 있었다는 점에서 금관가야의 왕권이 여전히 잘 보존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 돌덧널무덤: 지면을 깊게 파고 자갈 따위의 석재로 덧널을 만든 무덤. 널길이 없는 것이 특징.

영문

영문 해설 내용

73호분은 5세기 후반에 만든 돌덧널무덤이다. 대성동 고분군에서 조사된 돌덧널무덤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무덤구덩이의 길이가 8m가 넘는다. 도굴로 인해 돌덧널이 많이 파손되고 껴묻거리가 유실되었다.

돌덧널의 벽면을 따라 바닥에서 목조시설의 흔적이 확인되었는데, 벽을 쌓기 위해 마련된 목조틀 또는 나무덧널로 추정된다. 덧널 바닥에는 작은 깬 돌을 깔았다.

이곳에서 출토된 토기 중에는 창녕이나 진주 등 다른 지역의 고분에서 출토되는 것들과 유사한 토기들이 포함되어 있어 5세기 후반 이후에도 금관가야가 다른 지역과 활발하게 교류하였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