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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원(흥선대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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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원(흥선대원왕)
흥원(흥선대원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흥원(흥선대원왕)
한자 興園(興宣大院王)
주소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 산22-73
지정(등록) 종목 경기도 기념물 제48호
지정(등록)일 1978년 10월 10일
분류 유적건조물/무덤/왕실무덤/조선시대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흥원(흥선대원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흥원은 조선 제26대 왕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묘이다. 1863년 철종이 자식 없이 세상을 떠나자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둘째 아들인 명복(후에 고종)을 왕위에 올리고 자신은 대원군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흥선대원군은 국정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흥선대원군은 《대전회통(大典會通)》 등 법전을 정비하고, 왕의 외척이 국가를 운영하던 정치기관인 비변사를 없앴다. 그리고 조선 시대 행정기관인 의정부의 기능을 부활시키는 한편 새로운 군사 기관인 삼군부를 두어 행정권과 군사권을 분리하였다. 또한 세제를 개혁하여 국고를 충실히 하였으며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하여 경복궁을 새로 고쳤다.

한편, 흥선대원군은 천주교를 탄압하고 청을 제외한 일본 및 서양에 나라 문을 강력히 걸어 잠그는 쇄국정책을 펼쳤다. 나라 간에 물건을 사고파는 것을 요구하며 강화도로 쳐들어온 프랑스(병인양요, 1866년)와 미군(신미양요, 1871년)을 격퇴하였고, 새로운 방식의 국교 관계를 체결하려는 일본의 요구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집권 10년 만에 명성황후와의 권력 다툼으로 정계에서 물러났다. 그 후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다시 집권하였으나 청에 납치되어 4년간 갇혀있기도 하였다.

흥선대원군의 묘는 원래 1898년 고양군 공덕리현 서울 공덕동에 있었으나 1908년 파주군 대덕리로 이장하면서 흥원으로 격상되었다. 이후 1966년에 현재의 장소로 옮겼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