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명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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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명활성 Myeonghwalseong Fortress, Gyeongj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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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경주 명활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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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Myeonghwalseong Fortress, Gyeongju |
한자 | 慶州 明活城 |
주소 | 경북 경주시 보문동 일원 |
지정번호 | 사적 제47호 |
지정일 | 1963년 1월 21일 |
분류 | 유적건조물/정치국방/성/성곽 |
시대 | 신라 |
수량/면적 | 894,850㎡ |
웹사이트 | 경주 명활성,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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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명활산을 둘러싸고 있는 신라시대 산성으로 경주 주변의 남산신성, 서형산성, 북형산성과 함께 수도 방어시설로 큰 몫을 한 곳이다. 성의 둘레는 약 6km로 토성과 석성이 함께 있는데, 석성은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사용한 신라 초기의 축성 방식을 보이고 있다.
『삼국사기』에 실성왕 4년(405)에 왜병(倭兵)이 성을 공격해 왔으나 격퇴시켰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고, 눌지왕 15년(431)에도 왜구가 이 성을 공격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자비왕 18년(475)부터 소지왕 10년(488)까지는 이곳을 궁성으로 사용하였다. 선덕여왕 때에는 비담(毗曇) 등이 이 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김유신을 중심으로 한 관군에게 평정되었다.
성 주변에서 진흥왕 12년(551)에 만든 명활산성 작성비(作城碑)가 발견되어 공사 총책임자, 실무자, 공사기간 등 당시 축성에 관한 내용을 전해 주는데 처음에 토성이었다가 이때에 석성으로 고쳐 쌓은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