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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오작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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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오작당
상주 오작당,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상주 오작당
한자 尙州 悟昨堂
주소 경상북도 상주시 선상서로 1975 (낙동면)
지정(등록) 종목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32호
지정(등록)일 1982년 2월 24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상주 오작당,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상주 오작당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조정(1555~1636)이 선조 34년(1601)에 지은 집이다. 상주 양진당(보물 제1568호)에서 조금 떨어진 남쪽에 뒷산을 등지고 장천과 주변의 넓은 말밭들을 향하고 있다. 인조 6년에 풍양 조씨 종갓집으로 양진당을 새로 건립해 옮겨 살았다. 그 후 조정의 증손자인 조대윤이 현종 2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살림집으로 사용했다. 원래는 40여 칸이었는데, 정조 5년에 보수하면서 부분적으로 헐어내고 지금은 안채와 사랑채, 집안에 설치하는 사당인 가묘가 남아 있다. 옛날 방식으로 만든 문과 창문 등 조선 중기 살림집의 특성을 잘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양진당의 건축적 특징과도 유사한 점이 많아 그 가치가 높다.

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사랑마당의 왼쪽에 중간 문을 중심으로 좌우로 중문간채와 사랑채가 있는데, 앞면 7칸, 옆면은 1칸과 2칸이다. 사랑채 뒤로는 앞면 5칸, 옆면 2칸에 정지, 안방, 대청, 건넌방으로 구성된 안채가 있다. 안채 뒤편 좌측 담장 모서리에는 가묘가 있고, 맞은편 담장 밖에는 조정의 불천위 사당*이 있다. 안채는 각 방이 앞뒤로 배치된 2층 구조이고, 부엌 위에 각종 집안 물건을 보관할 수 있는 창고를 두었다. 네모기둥의 모서리를 깎아 둥글게 다듬은 기둥머리 위에 연꽃봉우리 조각재로 대들보를 받쳤다.


  • 불천위 사당: 국가에 큰 공을 세웠거나 덕이 높은 사람에게 그 신위를 영구히 사당에 모실 것을, 나라 혹은 지역 유림에서 허락해 제사를 지내는 집.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조정(1555~1636)이 지은 집이다.

1601년 처음 지어진 것을 1661년 증손자 조대윤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 살림집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1781년에 중수하면서 안채 좌우의 익사 등을 철거하였다.

지금은 안채, 사랑채, 중문간채, 가묘가 남아 있다.

안채는 낙동강 홍수로 인한 침수에 대비하기 위해 축대를 높게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지었다. 겹집 형태로 되어있어 대청과 방이 앞뒤로 자리하며, 왼쪽에 있는 부엌은 2층으로 구성해 위쪽에 창고를 두었다.

사랑채는 왼쪽의 온돌방과 오른쪽의 대청마루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으며, 중문간채와 '一'자로 연결되어 있다.

안채 오른쪽 뒤편에 있는 가묘에는 조정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이 집은 풍양 조씨 종가인 양진당(보물 제1568호)과 유사한 건축적 특징을 보여주며, 앞선 시기에 지어졌기 때문에 양진당 건축의 원형으로 평가받는다.

  • 이 집이 처음 지어졌던 자리 앞에는 풍양 조씨의 종갓집인 양진당이 세워졌다.
  • 오작당의 당호는 지난 잘못을 깨달아 과실을 두 번 다시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뜻이다.
  • 1993년에 대문을 신축했고, 1994년 중문간채를 다시 지었다.

참고 자료

  • 나무과자, 다음 블로그 http://blog.daum.net/marubo/13426434 -> 세부 사진 및 집 평면도
  • 제3차 문화재위원회(민속문화재분과) 회의록, 2020 -> 상주 오작당은 기록을 통해 창건 연대가 1663년으로 명확한 것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가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781년 중건 이후 익랑의 소실과 문간채의 변형을 고증할 만한 자료가 발굴되지 않아 건물의 원형을 추정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