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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곡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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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0년 9월 5일 (토) 19:2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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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곡재
Dogokjae House
도곡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도곡재
영문명칭 Dogokjae House
한자 陶谷齋
주소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육신사길 60 (묘리)
지정(등록) 종목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2호
지정(등록)일 1995년 5월 12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동1,792㎡
웹사이트 도곡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도곡재(陶谷齋)는 사육신 중 한 분인 박팽년 선생의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는 묘골마을 내에 자리하고 있다. 이 건물은 대사성을 지낸 서정공 박문현이 정조 2년(1778)에 주택으로 건립하였다고 전하여 지는데, 19세기 중엽부터 도곡공 박종우(陶谷公 朴宗佑)의 재실로 사용하면서 선생의 호를 따서 도곡재라 부르게 되었다. 후에 도곡재는 살림집으로 바뀌었다.

박종우는 인조 때의 문신으로 낙재 서사원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한강 정구 문하에 출입하였으며, 병자호란 때 인조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북향하여 통곡하고, 평생 동안 지은 글을 모두 태워 버렸다고 한다. 또한 자칭 숭정처사(崇禎處士)라 하고 종신토록 세상에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달성 10현 중 한사람이다.

도곡재는 조선시대 남부지방 양반가옥의 실례를 잘 보여주며 안채, 사랑채, 대문채 등이 3개의 권역으로 분리되어 튼ㅁ자형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사랑채인 도곡재는 원래 정면 4칸, 측면 1칸 규모였으나 후대에 재실로 사용하면서 왼쪽에 퇴칸 1칸을 달아 내고 대청을 넓혀 누(樓)처럼 꾸몄다.

영문

Dogokjae House

영문 해설 내용

초안

이 집은 조선시대의 문신인 박문현(1798-1875)이 1778년에 지었다.

19세기 중반에는 조선시대의 문신인 박종우(1587-1654, 호: 도곡)의 묘소를 관리하고 제사를 준비하기 위한 재실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박종우는 박팽년(1417-1456)의 후손으로, ‘달성 10현’으로 꼽힌다.

이 집은 사랑채, 안채, 대문채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도곡재’는 이 중 사랑채에 해당한다.

사랑채는 앞쪽에 마루를 두고 안쪽에 온돌방을 둔 구조이다. 재실로 이용하면서 왼쪽으로 작은 퇴칸을 덧붙여 누마루처럼 꾸며서 대청을 넓혔고, 앞쪽 마루와 퇴칸을 삼각형의 쪽마루로 연결했다.

각 건물의 영역은 담장으로 분리되어 있으며, 안채와 사랑채의 아궁이 위에 다락을 만든 것이 독특하다.

  • 박종우 행적에 대한 사실 관계 확인 필요 : 병자호란 때 참전하고자 했으나 90이 넘은 노모가 계서 나서지 못했고, 이후 인조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자신이 쓴 글을 모두 태우고 평생 은거하였다고 한다. / 병자호란에 참여해 전사했다고 한다.
  • 박팽년은 1455년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폐하고 왕위에 오르자, 이에 반대한 이들과 함께 세조를 살해하고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들의 모의는 발각되었고 모진 고문을 당한 뒤 처형당했다.
  • 박문현과 박종우는 모두 박팽년(1417-1456)의 후손이며, 이 집이 위치한 묘동은 순천 박씨 후손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참고자료

-> 건물별 상세사진. 아궁이 위 다락 언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