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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남 남산영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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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남 남산영당
금남 남산영당,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금남 남산영당
한자 錦南 南山影堂
주소 세종특별자치시 남산길 51-4
지정(등록) 종목 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자료 제7호
지정(등록)일 2012년 12월 31일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사우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동/61.3㎡
웹사이트 금남 남산영당,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남산영당은 조선 중기의 문신 남이웅(南以雄)의 영정을 모신 영당으로, 고종 43년(1906)에 지역의 선비들이 세운 것이다.

남이웅은 광해군 5년(1613)에 문과에 급제한 뒤, 이괄의 난 때 도원수 장만을 도와 공을 세운 인물이다. 인조 15년(1637) 1월 병자호란이 끝난 후에는 소현세자가 중국 심양으로 끌려갈 때 모시고 다녀왔으며, 소현세자 빈 강씨의 사사*에 반대하여 사직하였다가 복직하였다. 인조 25년(1647)에는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으며, 예법에 조금도 어김이 없어 주위 사람들이 모두 탄복했다고 한다.

남산영당은 삼문과 담장 안에 있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 영당 안에는 남이웅의 영정과 유품이 모셔져 있다. 영당의 뒤쪽에는 남이웅의 무덤과 효종 9년(1658)에 세운 묘비가 있다.


  • 사사(賜死): 죽일 죄인을 대우하여 임금이 독약을 내려 스스로 죽게 하던 일.

영문

영문 해설 내용

남이웅(南以雄, 1575~1648)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이 지역의 선비들이 1906년에 세웠다.

남이웅은 1613년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지냈으며, 예법을 잘 지키고 검소한 것으로 유명했다. 병자호란이 끝난 1637년에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1612-1645)가 중국 심양에 볼모로 잡혀갈 당시 세자의 스승으로 함께 따라갔다가 돌아오기도 하였다.

영당은 삼문과 담장 안에 있는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안에 남이웅의 영정과 유품이 보존되어 있다.

유품 중에는 부인 남평 조씨가 병자호란과 이후 4년의 일을 기록한 『남평조씨 병자일기(南平曹氏 丙子日記)』(세종특별자치시 유형문화재 제4호)를 비롯해 인조의 하답 문서 12건과 남이웅이 받은 좌의정 임명 교지, 공신 교서 등이 있다.

인근에 남이웅과 부인 조씨의 합장묘와 1658년에 세워진 묘비가 있다.

  • 기울임꼴 내용 넣을것인지 고민 필요.
  • 영당 안의 영정이 초본인지 모사본인지 등 정보 확인 불가능함.


참고자료

-> 영정 정보 남이웅의 영정은 모두 4점이고, 이 중 2점이 초본이다. 초본 2점은 하나는 1627년 명나라 사행(使行) 때 중국 화가 태방정이 그린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이웅이 좌의정 재임 시 그린 초상화를 참고하여 1706년에 다시 그린 것이다.

-> 남산소 마을에는 남이웅과 부인 남평조씨(南平曺氏) 조애중(曹愛重)[1574~1645]의 합장묘가 있다. 남이웅이 충청도 관찰사로 재직 중 이곳에 터를 잡았다고도 하며, 이 일대가 사패지(賜牌地)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남산소에 의령남씨가 거주하게 된 것은 1762년 무렵인 것으로 추정된다.

->남산영당 내에는 남이웅의 영정과 유품이 보존되어 있다. 그 가운데 『시북노정기(市北路程記)』와 『남평조씨 병자일기(南平曹氏丙子日記)』가 주목된다. 이 외에도 남이웅이 1647년 병을 이유로 올린 사직 상소에 인조가 하답한 문서 12건이 보존되어 있다. 남이웅이 좌의정으로 승진한 교지와 진무공신교서(振武功臣敎書)도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