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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 덕천군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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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 덕천군 사우
장군 덕천군사우,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장군 덕천군 사우
한자 將軍 德泉君 祠宇
주소 세종특별자치시 태산길 93-6
국가유산 종목 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자료 제6호
지정(등록)일 2012년 12월 31일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사우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동/ 76.5㎡
웹사이트 장군 덕천군사우,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장군 덕천군 사우는 조선 정종의 열 번째 아들인 덕천군 이후생(德泉君 李厚生)의 위패를 모신 사우(부조묘, 不祧廟)*이다.

덕천군은 효심이 깊고 우애가 있었으며, 평소 가난한 백성의 구호를 위해 힘써 ‘덕을 쌓은 어른’이라는 의미의 ‘적덕공(積德公)’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사우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원래 세종시구 연기군 남면 방축리에 지었으나, 건물이 낡아 영조 15년(1739)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고종 때 후손 이건창이 암행어사로 내려와 사우를 보수하였고, 1960년에 대대적으로 중수하였다.

현재 사우 옆에는 1974년에 경기도 광주에서 옮겨온 덕천군 묘와 신도비가 있다.


  • 부조묘(不祧廟): 불천위 제사의 대상이 되는 신주를 둔 사당. 본래 4대가 넘는 조상의 신주는 사당에서 꺼내 묻어야 하지만 나라에 공훈이 있는 사람의 위패는 왕의 허락으로 4대가 지나도 옮기지 않고 사당에 계속 두면서 기제사를 지낼 수 있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조선 정종(1398~1400 재위)의 열 번째 아들인 덕천군 이후생(德泉君 李厚生, 1397~1465)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어머니인 성빈 지씨가 흰 기린 꿈을 꾼 뒤 덕천군을 낳았다고 한다. 그는 왕자의 신분이었지만 직접 농사를 지었고, 효심이 깊고 우애가 있었으며, 여름 홍수로 발생한 수백 명의 이재민을 구제하는 등 가난한 백성의 구호를 위해 힘써 ‘덕을 쌓은 어른’이라는 의미의 ‘적덕공(積德公)’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사우는 뒤에 제단을 설치하고 앞에 참배 공간을 둔 구조로 되어 있다. 건물 안쪽에는 중앙에 덕천군의 신위가 모셔져 있고 양쪽에 1873년 덕천군과 그의 부인을 대상으로 내려진 교지가 걸려있다.

원래 연기군 남면 방축리에 지었으나, 건물이 낡아 1739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고종(1863~1907 재위) 때 덕천군의 후손 이건창(李建昌, 1852~1898)이 암행어사로 내려와 보수와 운영에 도움을 주기도 했으며, 1960년에 대대적으로 중수하였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