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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곡사 국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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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곡사 국사당
마곡사국사당,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마곡사 국사당
한자 麻谷寺 國師堂
주소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565
지정(등록) 종목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63호
지정(등록)일 1984년 5월 17일
분류 유적건조물/종교신앙/불교/당우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마곡사국사당,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마곡사 국사당은 신라~고려시대에 최고의 승려인 ‘국사(國師)’ 자장·범일·도선·보조(지눌) 등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조선후기까지 ‘삼국사영당’ 이라 하여 세분의 국사만 모시다 보조국사의 영정을 더하였다.

신라때 자장율사가 마곡사를 지은 후 도선이 중수하였으며 신라 말에 범일이 절을 다시 세웠다는 전설에서 나타나듯 모두 마곡사의 역사에 중요한 인물이었다. 고려시대의 보조국사 지눌은 폐허가 되어 도둑들이 숨어 지내던 마곡사 터에 와 춤을 추며 “금방울 소리가 소나무 사이에서 울린다” 라는 시를 읊고 절을 새로 지었다고 한다. 그 후 마곡사의 승려들이 옛 고승의 뜻을 기리기 위해 개울 서남쪽에 작은 사당을 세운 것이 국사당의 시작이 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1796년(정조 20)에 지은 것이며, 1868년(고종 5)에 ‘삼국사당’ 현판을 걸었다가 현대에 산신도를 두면서 ‘산신각’으로 바뀌었다. 국사당 옆에 천년 된 잣나무가 있었는데, 조선후기에 바람에 쓰러져, 그 나무를 영은암의 기둥으로 썼다고 한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국사당은 절을 세운 사람이나 훌륭한 스님들의 영정을 모신 곳으로, 조사당이라고도 한다.

마곡사 국사당은 마곡사의 역사에 중요했던 인물들의 영정을 모시고, 이들을 기리기 위해 작은 사당을 세운 것에서 시작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796년 중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마곡사를 창건했다고 전하는 자장(590-658)과 마곡사의 사세를 확장했다고 하는 도선(827-898), 범일(810-889) 등 신라의 고승 세 명의 영정을 모신 후 ‘삼국사영당’으로 불렀다. 여기에 고려 시대에 마곡사를 정비했던 지눌(1158-1210)의 영정을 조선 후기에 추가로 모셨다.

2006년 마곡사 경내에 조사전을 세우면서 이곳에 있던 영정들이 옮겨졌고, 대신 산신탱화를 봉안하면서 ‘산신각’으로 용도가 바뀌었다. 불교 사찰에서 산신을 모시는 것은 한국에서만 나타나는 독특한 사례이며, 한국의 불교가 토착신앙과 조화를 이루며 발전한 모습을 보여준다.

  • 탱화에는 나무와 호랑이들 그리고 여신과 남신 그리고 시녀 동자 등이 어우러져 있다.
  • 기울임꼴(산신각 의미) 넣어야할지..?
  • 마곡사 연혁 중 ‘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오고 있으며 고려 명종(明宗) 때인 1172년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중수하고 범일(梵日) 대사가 재건하였다고 합니다. 도선국사(道詵國師)가 다시 중수하고 각순 (覺淳) 대사가 보수한 것으로 전해오고 있습니다.’라고 하는데, 범일과 도선의 이름이 뒤에 나오는데, 생몰년으로 보면 보조국사(=지눌)보다 앞선 시대 사람이며, 실측보고서에서도 시대적인 오류가 크다고 지적한 바 있음. -> 현재 내용은 문화콘텐츠닷컴 설명 참조하여 작성한 것.


참고 자료

-> 신라 문성왕 9년(847)에 범일 국사와 헌강왕 3년(877)에 도선 국사가 각각 중수 확장하였다. 그 후 신라말부터 퇴락된 것을 고려 때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이 크게 중창하였다.

  • 공주 마곡사 대웅보전·대광보전 정밀실측조사보고서 상, 문화재청 2012.

-> 영정이 봉안된 국사들에 대한 정보와 마곡사와의 관련성 설명 / 산신각이 된 내력 간단히 설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