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암서원 묘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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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암서원묘정비
극락조, 정읍 고암서원 묘정비, A Bird of Paradise, 다음 블로그.
대표명칭 고암서원묘정비
한자 考巖書院廟庭碑
주소 전북 정읍시 모촌길 48-17 (하모동)
국가유산 종목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81호
지정(등록)일 1984년 4월 1일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고암서원 묘정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묘정비는 사원이나 향교 따위의 뜰에 세운 비석이다. 고암서원 묘정비에는 영조 23년(1747)에 이재가 지은 글이 새겨져 있다.

고암서원은 조선 후기 성리학자 송시열(宋時烈)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세워졌다. 숙종 15년(1689) 송시열은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런데 6년 후 그가 죄가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숙종 21년(1695) 임금이 직접 이름을 지어 내리고 고암서원을 세웠다. 정조 9년(1785)에는 송시열의 수제자 권상하의 위패를 추가로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이 서원은 고종 8년(1871) 서원 철폐령에 따라 건물이 모두 헐리고 비석만 남게 되었다. 이후 1991년 유림들과 정읍시가 뜻을 모아 서원이 있던 자리에 쓸쓸하게 남아 있던 비석을 정비하여 다시 세웠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1747년에 세운 이 비석은 고암서원의 건립 과정 등을 기록하여 세운 것으로, 지금은 비각 안에 보호되어 있다.

비석은 거북 모양의 받침돌 위에 몸돌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렸다. 앞면에는 ‘고암서원묘정비’라는 글씨가, 비석 뒷면에 1738년 고암서원 원장을 맡았던 바 있는 이재(1680-1749)가 지은 글이 새겨져 있다.

고암서원은 송시열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1695년에 설립되었다. 1785년에는 송시열의 제자 권상하(1641-1721)의 위패를 추가로 모셨다.

송시열은 1689년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는데, 이후 그가 죄가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 서원이 세워졌다. 같은 해 전라도 유생들의 요청으로 숙종이 직접 ‘고암’이라는 이름을 지어 내렸다.

고암서원은 1871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고 비석만 남게 되었는데, 1991년 지역 유림들과 정읍시가 합동하여 서원을 복원하였다. 남아있던 비석도 이 때 다시 정비하여 세웠다.

  • 이재는 1738년(영조 14)에 고암서원의 원장을 맡았다.46) 이재는 18세기 전반기에 활동한 대표적인 노론계 인사였다.
  • 유허(遺墟)에 세워져 있는 비(碑)는 귀부(龜趺: 거북이 모양으로 만든 비석의 받침돌) 위에 세워져 있다. /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겹처마로 된 원향유허비각(院享遺墟碑閣)이 있으며 이재(李縡)가 찬(撰)한 묘정비(廟庭碑)가 있다.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