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분황사지
경주 분황사지 Bunhwangsa Temple Site, Gyeongj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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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경주 분황사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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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Bunhwangsa Temple Site, Gyeongju |
한자 | 慶州 芬皇寺址 |
주소 | 경상북도 경주시 월성동 분황로 94-11 |
지정(등록) 종목 | 사적 제548호 |
지정(등록)일 | 2019년 2월 26일 |
분류 | 유적건조물/종교신앙/불교/사찰 |
수량/면적 | 28,703 |
웹사이트 | [0 경주 분황사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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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 3년(634)에 창건된 이래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 3금당(三金堂)과 강당을 갖춘 큰 절이었으나, 고려 고종 25년(1238)의 몽고침입과 조선시대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대부분의 건물들이 없어지고 여러 차례 새로 지어지면서 축소되었다. 보광전(普光殿)이 중심 건물이 된 지금의 분황사는 광해군 원년(1609)에 다시 지어진 것이다.
신라를 대표하는 고승인 자장(慈藏, 590∼658)이 이 절에 머물렀고, 원효(元曉, 617~686)는 이곳에서 화엄경소(華嚴經疏), 금광명경소(金光明經疏) 등을 저술하였다. 그의 아들 설총은 원효의 유해로 소상(塑像)*을 만들어 이곳에 모셨다고 한다. 솔거(率居)가 그린 관음보살상 벽화가 있었고, 경덕왕(재위 742∼765)때 강고내말(强古乃末)이 약사여래상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또 희명(希明)의 다섯 살 난 아이가 갑자기 눈이 멀자 분황사의 천수대비 앞에 가서 '도천수대비가(禱千手大悲歌)'를 부르면서 빌었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절에는 국보 제30호 모전석탑, 원효대사비의 받침돌인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 화쟁국사비부, 호국용이 살았다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호 석정(石井) 등 많은 석조문화재가 남아있다.
- 소상(塑像): 찰흙으로 만든 사람의 형상(形像).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이곳은 634년 창건된 이래 지금까지 존재하는 사찰 분황사가 자리한 곳이다.
1990년부터 2014년까지 이루어진 발굴조사를 통해 창건 당시 신라 최초로 3개의 금당과 1기의 탑을 배치한 대규모의 가람이었던 것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1238년의 몽고침입과 1592년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세 차례 중건되는 과정에서 규모가 축소되었다.
보광전이 중심이 되는 지금의 분황사는 1609년에 다시 지어진 것이다.
경내에는 모전석탑(국보 제30호)과 원효대사비의 받침돌인 화쟁국사비부(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 나라를 지키는 용이 살았다고 하는 석정(石井,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호) 등 많은 석조문화재가 남아있다.
이곳은 신라를 대표하는 고승 자장(慈藏)과 원효(元曉)가 머무르면서 불법을 전파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희명이라는 이름의 여인이 다섯 살에 갑자기 눈이 멀게 된 아이를 데리고 분황사의 천수대비 앞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소원을 빌자 아이가 눈을 뜨게 되었다는 향가 ‘도천수관음과’와 관련한 설화도 전해진다.
- 이곳에는 솔거(率居)가 그린 관음보살상 벽화가 있었고, 경덕왕(재위 742∼765)때 강고내말(强古乃末)이 약사여래상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 분황사는 황룡사, 흥륜사 등과 함께 신라의 삼국통일 이전 왕경(경주)에 조성되었던 칠처가람(七處伽藍)의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