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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시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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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시의 묘
권시의 묘,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권시의 묘
한자 權시의 墓
주소 대전광역시 서구 탄방동 239-1
지정(등록) 종목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51호
지정(등록)일 2008년 8월 22일
분류 유적건조물/무덤/무덤/기타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권시의 묘,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이곳은 조선 후기 공주 탄방에 세거하였던 예학자이자 문신인 탄옹 권시(炭翁 權諰)의 묘이다. 탄옹은 어려서 안자(顔子: 공자의 수제자 안회)에 비유될 정도로 총명하였으며 학문에도 독실했다. 조선 인조 때인 1636년에는 대군사부(大君師傅)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하였고, 이후에도 선릉참봉, 세자시강원자 등의 벼슬을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후 1649년 공조좌랑(工曹佐郎)으로 처음 벼슬길에 나아가 경상도사, 승지, 찬선(贊善)을 역임한 후 한성부 부윤에 임명되었다. 사후에 좌참찬(左參贊)으로 추증되었으며, 대전 도산서원에 제향(祭享)되었다.

묘소는 조선 현종 13년(1672) 보문산 사정동에 조성되었다가 조선 숙종 26년(1700)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묘소는 부인 함양 박씨와 합장묘(合葬墓)로 조성되었으며, 석물로는 신도비, 문인석, 신·구 묘정비, 상석, 망주석 등이 있다. 구 묘정비(廟庭碑)는 1712년에 세웠던 것으로, 조선 영조 때인 1737년에 신 묘정비를 세우면서 현재의 분묘 인근에 묻었던 것을 다시 세운 것이다. 신 묘정비의 비문은 탄옹의 사위이자 문인이었던 윤증(尹拯)이 지었고, 글씨는 외증손 윤동원(尹東源)이 썼다. 망주석은 기둥이 정사각형의 단면이고, 위쪽은 둥글게 처리되어 있다. 이와 같은 형태의 망주석은 조선시대의 분묘에서는 찾아보기 매우 어려운 예로, 문화사적 가치가 크다. 현재의 상석은 새로 만든 것이고, 이전의 상석은 현재의 묘소 부근에 묻었다.


  • 대군사부: 임금의 적자(嫡子)를 가르치는 일을 맡아보던 종구품 벼슬.
  • 좌참찬: 조선시대 의정부 정2품 관직.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조선 후기 예학자 권시(1604∼1672)의 묘이다.

권시는 1649년 관직에 처음 나갔으며, 1660년 예송 논쟁으로 파직되어 낙향한 후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현재 서원 자리에 서당을 짓고 강학하며 예학에 정진하였다. 송시열과 같은 기호학파로 예론에 밝았다.

묘소는 부인 함양 박씨와의 합장묘이다. 보문산 사정동에 처음 조성되었다가 1700년에 한차례 옮겨졌고, 1869년 현재의 자리로 다시 옮겨 모셨다.

봉분 앞에 상석, 향로석과 비석 2기가 있고, 아래쪽에 망주석 1쌍과 문인석 1쌍이 있다. 묘지 입구에는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봉분 앞 오른쪽에 있는 비석은 1737년에 새로 세운 것으로, 윤증이 비문을 짓고 윤동원이 글씨를 썼다. 나머지 하나는 1712년의 것으로, 현재의 분묘 인근에 묻혀있었던 것을 찾아 다시 세운 것이다.

정사각형 기둥에 위쪽이 둥글게 처리되어 있는 형태의 망주석은 조선시대의 분묘에서는 찾아보기 매우 어려운 예이다.

무덤 뒤편에는 권시와 그의 아버지 권득기의 위패를 모신 도산서원이 있다.

  • 현재의 상석은 새로 만든 것이고, 이전의 상석은 현재의 묘소 부근에 묻었다. => 정보 확인 어려움.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