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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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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0년 4월 29일 (수) 20:29 판 (1차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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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객사
순창객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순창객사
한자 淳昌客舍
주소 전라북도
지정(등록) 종목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8호
지정(등록)일 1974년 9월 27일
분류 유적건조물/정치국방/궁궐·관아/관아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순창객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순창객사는 조선시대 관청의 손님이나 사신이 머물던 곳으로서 새로이 부임한 수령은 반드시 이곳에 와서 참배를 하여야 하며, 국상(國喪)을 당한 때에도 관패(官牌)에 망배(望拜)하게 되어 있다. 원래 이곳에는 정당(正堂)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대청(東大廳)과 서대청(西大廳)을 비롯하여 중문(中門)과 외문(外門)등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정당과 동대청만이 있다. 건립연대는 1759년으로 추정된다. 한말에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킨 임병찬 의병장이 의병을 이끌고 이 객사에서 진을 치고 일본군과 전주에서 파견된 시위대에 맞서 격전을 벌였던 곳이기도 하고, 면암 최익현 선생이 항일 의병본부로 사용하다가 일본군에게 붙잡힌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수정 국문

초고

이 건물은 조선시대에 관청의 손님이나 사신이 머물던 곳으로 처음 지어진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759년에 중건되었다.

이 지역에 새로 부임한 수령은 반드시 객사에 와서 참배를 해야 했으며, 국상(國喪)을 당한 때에도 궐패(闕牌)를 바라보고 절을 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정읍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임병찬(林炳瓚, 1851~1916)이 의병을 일으켜 이곳에서 진을 치고 일본군 및 시위대에 맞서 격전을 벌였다. 그리고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은 이곳을 항일 의병 본부로 사용하다가 일본군에게 붙잡히기도 하였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이후 다른 용도의 건물로 사용되다가 1980년대 초부터 현재의 모습을 갖춰나가기 시작하였으며, 2010년대까지 여러 차례 주변 정비사업을 실시하였다.

원래는 가운데 정당(正堂)을 중심으로 왼쪽에 동대청(東大廳), 오른쪽에 서대청(西大廳), 앞쪽에 중문(中門)과 외문(外門), 옆쪽에 낭무(廊廡)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현재는 정당과 동대청만이 남아 있다.

동대청에는 “옥천지관(玉川之館)”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객사를 복원하면서 이곳을 상징하는 의미의 현판을 걸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는데, 마한시대 순창의 지명으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옥천(玉川)”을 사용한 것이다. 이 현판은 2014년에 새롭게 마련되었다.

1차 수정

객사는 조선시대에 관청의 손님이나 사신이 머물던 곳이다.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시는 정당(正堂)과 숙소로 사용되던 익실로 이루어져 있다. 새로 부임한 수령은 반드시 객사에 와서 참배를 해야 했으며,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그리고 나라의 일이 있을 때에도 궁궐을 향하여 절을 올렸다.

순창객사가 처음 지어진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759년에 중건되었다. 원래는 가운데 정당을 중심으로 양옆에 대청이 있었는데, 오른쪽 대청은 없어졌다. 일제강점기 이후 다른 용도의 건물로 사용되다가 1980년대 초부터 현재의 모습을 갖춰나가기 시작하였으며, 2010년대까지 여러 차례 주변 정비사업을 실시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정읍에서 의병을 일으킨 임병찬(林炳瓚, 1851~1916)이 이곳에서 진을 치고 일본군에 맞서 격전을 벌였다. 그리고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이 이곳을 항일 의병 본부로 사용하다가 일본군에게 붙잡히기도 하였다.

왼쪽 대청에는 ‘옥천지관(玉川之館)’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 현판은 2014년에 새롭게 마련한 것이며, 옥천은 순창의 옛 지명이다.

문맥요소

Nodes

Links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