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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씨부인, 신경준선생 유지(귀래정, 신말주후손세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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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씨부인, 신경준선생유지(귀래정신말주후손세거지)
대표명칭 설씨부인, 신경준선생유지(귀래정신말주후손세거지)
한자 薛氏婦人, 申景濬先生遺址(歸來亭申末舟後孫世居地)
주소 전라북도 순창군 남산길 32-3
국가유산 종목 전라북도 기념물 제86호
지정(등록)일 1994년 8월 10일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생활유적
수량/면적 1,074㎡
웹사이트 설씨부인, 신경준선생 유지(귀래정, 신말주후손세거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이곳은 귀래정(歸來亭) 신말주(申末舟, 1429~1503)선생의 부인인 정부인(貞夫人) 설씨(薛氏, 1429~1508)와 신말주의 10대손인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 1712~1781)선생의 출생지이다. 신말주는 보한재(保閑齋) 신숙주(申叔舟, 1417~1475)선생의 아우로서 전주부윤, 전라도 수군절도사, 대사간 등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나,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절개를 지키기 위해 벼슬을 사직하고 정부인 설씨의 고향인 순창의 남산대로 낙향하여 자신의 호를 딴 귀래정을 짓고, 자연을 벗 삼으며 여생을 보냈다. 이후 그의 후손들은 줄곧 순창에서 대대손손 살았으며, 충신과 효자 등이 많이 배출되었다. 설씨부인은 순창 강천사(剛泉寺)의 복원을 위하여 『권선문(勸善文)』을 지은 당대의 뛰어난 여류 문장가이자 서화가이며, 신경준은 조선 영·정조시대의 지리학자이자 실학자로서 『산경표(山經表)』, 『동국여지도(東國輿地圖)』, 『팔도지도(八道地圖)』,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등의 편찬 등 다방면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수정 국문

초고

이곳은 신말주(申末舟, 1429~1503)와 그의 부인인 설씨(薛氏, 1429~1508), 그리고 신말주의 10대손인 신경준(申景濬, 1712~1781) 등 그의 후손들이 태어나고 살았던 곳이다. 일명 귀래정(歸來亭) 신말주 후손 세거지로 알려져 있다.

신말주는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를 도와 공을 세우고, 세조의 즉위에 공신으로 참여했으며 여러 관직을 역임했던 신숙주(申叔舟, 1417~1475)의 동생이다. 그 역시 형인 신숙주와 함께 세조의 즉위에 공을 세워 1455년 원종공신이 되었다.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는데 부인의 병을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순창에 잠시 머물던 시기에 그의 호를 딴 귀래정이라는 정자를 지었고, 70세에 은퇴한 이후 낙향하여 정자에서 주로 지냈다.

그의 부인인 설씨는 이곳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문장과 서화에 능하였다. 1482년에 강천사의 복원을 위해 지은 권선문(勸善文)과 사찰도가 전해진다.

신경준은 조선 후기 문신이자 실학자로 『산경표(山經表)』, 『동국여지도(東國輿地圖)』, 『팔도지도(八道地圖)』,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 등 다방면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이곳 유지는 정면에 일관문(一貫門)이라 쓰인 3칸의 외삼문이 있으며, 안쪽에 안채로 들어가는 여견문(如見門)이 있고, 사랑채로 들어가는 문이 따로 있다. 안채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자혜당(慈惠堂)이 있고 오른쪽에는 남애 정사(南厓精舍), 왼쪽에는 남산사(南山祠)라는 사당이 있다. 생활 영역과 사당 영역은 담장으로 구분되어 있다. 남애 정사 오른쪽으로는 문화유산이 보관되어 있는 유장각(遺藏閣)이 있고, 유장각 오른쪽에는 충서당(忠恕堂)이 있으며, 충서당 뒤쪽 언덕 위에 귀래정과 수백 년 된 노송들이 서 있다.

1차 수정

문맥요소

Nodes

Links

참고자료

○ 정훈, 「귀래정 신말주 연구」, 『한국언어문학』 92, 한국언어문학회, 2015. ○ 『세조실록』, 『성종실록』 ○ 『귀래정 실기』, 귀래정 실기 간행 위원회, 1994.

→ 기존 안내문 및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는 신말주에 대해 세조의 왕위 찬탈에 불만을 품고 낙향한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그는 1454년(단종 2)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대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1455년(세조 1) 계유정난의 공으로 원종공신에 녹훈되었고, 1456년(세조 2) 대에는 사간원 정언, 사간원 우정언, 1459년(세조 5) 종사관, 사간원 우헌납, 1461년(세조 7) 예조 정랑, 1464년(세조 10) 사간원 사간, 1466년(세조 12) 사간원 대사간, 형조 참의, 1476년(성종 7) 전주부윤, 1479년(성종 10) 진주목사 이후 창원부사,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사간원 대사간, 첨지중추부사, 전라수군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가 순창에 머문 시간은 부인의 병을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낙향한 1470년(성종 1)부터 다시 기록에 등장한 1476년(성종 7)까지 대략 7년 정도의 기간과 70세가 되어 관직에서 물러난 1498년부터 죽음을 맞이한 1503년까지 6년 정도의 기간이다 .
결론적으로 그는 세조의 왕위 찬탈에 불만을 품은 절의의 인물이 아니다. 그의 절의와 은거하는 선비의 이미지는 그와 친분이 있고 세조 정권에 참여하였던 서거정과 강희맹 등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서거정은 신말주가 지은 정자인 귀래정에 대해 「귀래정기」를 지어 주었고, 강희맹은 「전주부윤귀래정공신도비명」을 지어 주었는데, 신말주가 세조 즉위 후 낙담하여 낙향하였으나 형인 신숙주의 강권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벼슬을 하였고 마음속으로는 항상 순창을 그리워하고 은거하려 했다고 하였다.
또한 그의 10대 후손인 신경준은 「유허비명」을 지어 그가 벼슬길에 나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묘사하였다. 이는 신숙주의 문집이나 연대기 자료에는 볼 수 없는 기록으로 세조 정권 당시 관직에 나아간 신말주를 변호하는 입장에서 쓴 글이다.
그러므로 기존 안내문에 있는 신말주에 대한 설명은 재고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