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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용담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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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yndsey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9년 9월 2일 (월) 14:43 판 (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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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용담정사
Yongdamjeongsa Ritual House, Sancheong
"산청 용담정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산청 용담정사
영문명칭 Yongdamjeongsa Ritual House, Sancheong
한자 山淸 龍潭精舍
주소 경상남도 산청군 신차로 545(신등면)
지정(등록) 종목 문화재자료 제558호
지정(등록)일 2012년 12월 27일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사우
시대 일제강점기
수량/면적 2동(160㎡)
웹사이트 "산청 용담정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산청 용담정사는 용담 박이장을 기리기 위해 후손 박윤현이 1926년에 건립한 재실이다.

박이장은 조선 중기 경북 고령지역에서 활동한 문신이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켰으며, 이후 여러 관직을 지내다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치며 평생을 보냈다. 그가 쓴 용담선생문집은 문학적 가치가 높아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성주 청천서원에 모셔졌다가 후손들이 산청 단계리로 이주하면서 이곳에 재실을 짓고 이름을 용담이라고 하였다. 용담은 박이장 살던 고령의 마을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재실은 일반적으로 사당에서부터 대문까지 일직선상에 배치하여 위계를 나타내는 반면, 용담정사는 건물이 위치하고 있는 땅이 옆으로 길어 대문과 용담정사, 사당, 사당 협문이 ‘二’자 모양으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용담정사는 앞면 5칸, 옆면 2칸 건물로 앞면에는 사람이 한결 같아야한다는 뜻의 ‘여재당(如在堂)’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있다.

산청 용담정사는 단순하고 소박한 구조형식과 지형에 맞추어 ‘二’자 모양으로 건물들을 나란히 배치한 것 등 근대적인 건축기법이 잘 반영되어 있는 건물이다.

영문

Yongdamjeongsa Ritual House, Sancheong

Yongdamjeongsa is a ritual house for the preparation of ceremonial rituals for Park I-jang (1547-1622), a civil official of the mid-Joseon period. It was built in 1926, when his descendants moved to Dangye-ri, Sancheong.

Park I-jang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586 and served various official posts. He raised a civilian army during the Japanese invasions of 1592-1598 and went to Ming China as a royal envoy. After retirement, he stayed in the Goryeong area and taught younger scholars in his later years.

Generally in a shrine complex, a main gate, ritual house, inner gate, and shrine are aligned one in front of the other, with the shrine located on the highest location in the back. However, the plot on which Yongdamjeongsa and the shrine were built is a wide rectangular shape, and therefore, the ritual house area and the shrine area are built side by side.

The ritual house was named after the village, “Yongdam,” where Park I-jang lived.

영문 해설 내용

용담정사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박이장(1547-1622)의 재실이다. 1926년 그의 후손들이 산청 단계리로 이주하면서 지었다.

박이장은 1586년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켰으며, 1603년에는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고령 지역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다.

사당이 재실과 함께 지어지는 경우, 대문, 재실, 내삼문, 사당의 순으로 일직선상에 배치하여 사당이 높은 곳에 위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곳은 건물이 위치한 땅이 옆으로 길어 재실 영역과 사당 영역이 옆으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재실의 이름인 ‘용담’은 박이장이 원래 살던 고령의 마을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