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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면공 정부인 영광정씨 화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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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면공 정부인 영광정씨 화관비
대표명칭 신면공 정부인 영광정씨 화관비
한자 申㴐公 貞夫人 靈光丁氏 花冠碑
주소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구문천리 509
지정(등록) 종목 화성시 향토문화재 기념물 제14호
수량/면적 1기



해설문

국문

이 회관비(花冠碑)는 임진왜란 전에 세위진 유적으로 함길도관찰사 신면(申㴐)의 배위 정부인 영광정씨(靈光丁氏)의 화관비다. 1495년에 세워진 것으로 비신의 높이 150 cm. 너비 66cm, 두께 34cm, 기단의 높이 20c㎝, 너 비95 cm, 두께 67cm로 되어 있다. 신면(申㴐, 1948~1467)은 보한재 신숙주(申叔舟, 1417~1475)의 8남 1녀 중 둘째아들로 출생하여 좌익원종3등 공신, 우부승지, 우승지, 도승지 등을 지내시고, 함길도 관찰사에부임하여, 1467년 5월 18일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진압하다가 전사하였으며, 영광전씨(1437-1497)는 경기수군절도사를 지낸 정극근의 손녀요, 내금위사직을 지낸 정호(丁湖)의 따님으로 슬하에 1녀 2남을 낳으시니 사위가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의 차남 강학손(姜鶴孫, 1455~1523)이요, 큰 아들이 제군수를 지낸 용관(用灌, 1459~ 1519)이고, 작은 아들은 좌의정을 지낸 용개(用漑), 1463~1519)이다. 좌의정은 지낸 둘째 아들 이요정 용개(用漑),의 귀로 신면(申㴐)은 증영의정이요, 영광정씨는 증정경부인으로 증직된다. 화관비는 전면에 정부인정씨지묘(貞夫人丁氏之墓)라 음각되어있고 뒷면에는 12행 23열 264자로 음각되어 있으며, 글은 옹교 김전(金詮, 1458~1523, 뒷날 영의정)이 짓고 글씨는 부사정 박경(朴耕, ~1507)이 당나라 유공권체(柳公權體)로 썼다.

  • 신면의 생몰년 오류.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이 비석은 조선시대의 문신 신면(?-1467)의 부인인 영광정씨를 기리기 위해 1495년에 세워졌다.

영광정씨(1437-1497)는 경기수군절도사를 지낸 정극근의 손녀이고 내금위의 무관이었던 정호의 딸이다. 신면과 결혼하여 2남 1녀를 낳았다. 장남 신용관(1459-1519)은 조선시대 중앙군인 오위를 총괄하던 기관에서 근무하였고, 차남 신용개(1463-1519)는 좌의정을 지냈다. 사위는 뛰어난 문장가이자 문신이었던 강희맹(1424-1483)이다.

신면(?-1467)은 좌의정을 지낸 신숙주(1417-1475)의 둘째 아들이다. 세조(재위 1455-1468)가 왕위에 오르는 데 기여여 1456년 공신이 되었으며, 이후 도승지 등 여러 관직을 지냈다. 1467년 함길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같은 해 함길도의 호족인 이시애(?-1467))가 일으킨 난을 진압하다가 전사하였다. 후에 영의정으로 증직되었다.

비석은 기단, 몸돌,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높이 150cm, 너비 66cm, 두께 34cm이다. 앞면에는 “정부인 정씨의 묘”라고 새겨져 있으며, “정부인”은 조선시대 종친이나 고위 관직을 지낸 문무관의 아내에게 내려진 작위이다. 뒷면에는 264자의 비문이 새겨져 있는데, 후에 영의정을 지낸 김전(1458-1523)이 지었고 명필 박경(?-1507)이 글씨를 썼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