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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해설 내용===
 
===영문 해설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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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백제 때의 기와가마가 있던 터이다. 6세기 무렵 정림사가 창건될 때 이곳에서 기와를 제작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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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가마 1기가 발굴조사되었고, 소성실 바닥의 경사가 거의 없는 편평한 형태의 가마임이 확인되었다. 남아 있는 가마의 규모는 남북 길이 5m, 동서 너비 7.1m이다. 가마 주변으로 치미 등을 포함한 기와편이 다수 확인되었다.
  
  

2024년 7월 27일 (토) 10:22 판


부여 정림사지 와요지 扶餘 定林寺址 瓦窯址
Goto.png 종합안내판: 부여 정림사지



해설문

국문

1989년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백제시대 기와 가마터이다.

가마 1기가 조사되었으며, 가마 구조는 평요(平窯)*이다. 조사 당시에 평탄한 소성실(燒成室)** 바닥 부분만 확인되었다.

남아 있는 가마의 규모는 남북 길이 5m, 동서 너비 7.1m이다. 가마 주변으로 치미 등을 포함한 기와편이 다수 확인되었다.

백제시대 정림사 창건 시 이곳에서 기와를 제작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 평요: 소성실(燒成室) 바닥의 경사가 거의 없는 편평한 형태의 가마
  • 소성실: 그릇을 굽는 곳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이곳은 백제 때의 기와가마가 있던 터이다. 6세기 무렵 정림사가 창건될 때 이곳에서 기와를 제작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89년 가마 1기가 발굴조사되었고, 소성실 바닥의 경사가 거의 없는 편평한 형태의 가마임이 확인되었다. 남아 있는 가마의 규모는 남북 길이 5m, 동서 너비 7.1m이다. 가마 주변으로 치미 등을 포함한 기와편이 다수 확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