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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해설문'''== ===국문 2018=== 조선 정조(正祖) 16년(1792) 3월에 왕이 관원(官員) 이만수(李晩秀)에게 명하여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학덕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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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댐에 수몰되기 전에는 도산서원과 마주 보이는 강변에 비각이 세워져 있었다. 1975년 안동댐 건설 이후 원래 위치에 10m 높이의 돌축대를 쌓고 옛 건물과 비석을 옮겨 보존하였다.
 
안동댐에 수몰되기 전에는 도산서원과 마주 보이는 강변에 비각이 세워져 있었다. 1975년 안동댐 건설 이후 원래 위치에 10m 높이의 돌축대를 쌓고 옛 건물과 비석을 옮겨 보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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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국문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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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단은 조선시대 정조(1776~1800 재위)의 명령으로 특별 과거시험이 열렸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비석을 세운 곳이다. ‘시사(試士)’는 선비에게 시험을 보인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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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16년(1792) 정조는 규장각 관원 이만수(李晩秀, 1752~1820)에게 안동 도산서원을 방문하여 제사를 지내고, 제사에 모인 사람들에게 과거시험을 보이라고 명하였다. 제사에 쓸 제문(祭文)을 친히 지어 평소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을 존경하던 마음을 전하고, 특별 시험을 통해 영남의 인재를 선발하려는 취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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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정조는 도산서원의 강당인 전교당 앞마당에서 시험을 치르라고 지시하였으나,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을 수용하기 어려워 도산서원 앞을 흐르는 낙천 너머의 넓은 공간에서 과거시험이 열리게 되었다. 음력 3월 25일에 열린 과거시험은 도산별과(陶山別科)라 불렸으며, 7,228명이 응시하여 총 3,632장의 답안지가 제출되었다. 도산별과의 경위, 급제자들의 명단, 답안지는 같은해 『교남빈흥록(嶠南賓興錄)』이라는 책으로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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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20년(1796)에는 도산별과를 기념하기 위해 시험이 치러진 자리에 단을 마련하고, 당시 영의정이었던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이 비문을 지어 비석을 세웠다. 지금의 비석은 순조 24년(1824)에 비각을 새로 지으면서 고쳐 세운 것이다. 1975년 안동댐 건설 이후 원래 있던 자리에 10m 높이의 돌로 축대를 쌓아 올린 뒤 옛 건물과 비석을 원형대로 옮겨지었다.

2024년 6월 17일 (월) 12:55 기준 최신판

해설문

국문 2018

조선 정조(正祖) 16년(1792) 3월에 왕이 관원(官員) 이만수(李晩秀)에게 명하여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학덕과 업적을 기리는 뜻에서 도산서원(陶山書院)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과거(도산별과)를 실시하게 하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단을 만들고 비를 세운 것이 시사단이다.

원래의 석비는 1795년에 세웠으나, 현존비는 순조(純祖) 24년(1824)에 비각의 개축과 아울러 고쳐 세운 것으로 비문의 찬자는 영의정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이다. 비각은 사면 1칸의 팔작집이며, 중방 아래는 모두 판벽으로 돌려 막아 비바람의 침해를 예방하였으며, 겹처마의 사면 추녀 아래에는 각기 팔각 활주를 세워 견실한 구성을 보인다.

안동댐 건설로 당초의 위치에서 거북이 형태로 높게 단을 쌓아 물에 잠기지 않게 하였다.

기존 국문

강 건너편 비각(碑閣)은 조선시대 지방별과(地方別科)를 보았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정조대왕께서 퇴계(退溪) 이황(李滉)선생의 유덕(遺德)을 추모하여 그 16년(1792)에 이곳 송림(松林)에서 어제(御題)로 과거를 보았는데, 응시자는 7천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비문은 당시 영의정인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 지었다.

안동댐 수몰로 송림은 없어지고 단(壇)만이 현 위치에서 지상 10m 높이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과거를 보았던 자리를 표(標)해두고 있다.

수정 국문 2020

초고

시사단(試士壇)은 1796년 도산별과(陶山別科)를 기념하기 위해 지은 비석과 비각이 있는 장소이다. 시사는 선비에게 시험을 보인다는 뜻이다.

1792년 정조는 평소 존경하던 이황을 추모하기 위해 이 공간에서 특별히 과거 시험을 베풀었다. 이를 도산별과라 한다. 시험 응시자만 7천여 명에 이르렀고 문과급제 2명, 진사 2명이 선발되었다. 시험을 기념하기 위해 당시 영의정이었던 채제공이 비문을 썼고 시사단을 세웠다. 1824년에는 비각을 고쳐 짓고 비석도 새로 새겼다.

안동댐에 수몰되기 전에는 도산서원과 마주 보이는 강변에 비각이 세워져 있었다. 1975년 안동댐 건설 이후 원래 위치에 10m 높이의 돌축대를 쌓고 옛 건물과 비석을 옮겨 보존하였다.

1차 수정

시사단은 조선시대 특별 과거시험을 보았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과 비각이 있는 곳이다. ‘시사(試士)’는 선비에게 시험을 보인다는 뜻이다.

1792년 정조(1776~1800 재위)는 평소 존경하던 이황(李滉, 1501~1570)을 추모하기 위해 이곳에서 과거 시험을 열고 안동 지역의 인재를 선발하도록 하였다. 시험 응시자만 7천여 명에 이르렀고 문과급제 2명, 진사 2명이 선발되었다. 시험을 기념하기 위해 1796년 이곳에 단을 마련하고 비석을 세웠는데, 비문은 당시 영의정이었던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이 썼다. 1824년에는 비각을 고쳐 짓고 비석도 새로 새겼다.

안동댐에 수몰되기 전에는 도산서원과 마주 보이는 강변에 비각이 세워져 있었다. 1975년 안동댐 건설 이후 원래 위치에 10m 높이의 돌축대를 쌓고 옛 건물과 비석을 옮겨 보존하였다.

수정 국문 2023

시사단은 조선시대 정조(1776~1800 재위)의 명령으로 특별 과거시험이 열렸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비석을 세운 곳이다. ‘시사(試士)’는 선비에게 시험을 보인다는 뜻이다.

정조 16년(1792) 정조는 규장각 관원 이만수(李晩秀, 1752~1820)에게 안동 도산서원을 방문하여 제사를 지내고, 제사에 모인 사람들에게 과거시험을 보이라고 명하였다. 제사에 쓸 제문(祭文)을 친히 지어 평소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을 존경하던 마음을 전하고, 특별 시험을 통해 영남의 인재를 선발하려는 취지였다.

원래 정조는 도산서원의 강당인 전교당 앞마당에서 시험을 치르라고 지시하였으나,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을 수용하기 어려워 도산서원 앞을 흐르는 낙천 너머의 넓은 공간에서 과거시험이 열리게 되었다. 음력 3월 25일에 열린 과거시험은 도산별과(陶山別科)라 불렸으며, 7,228명이 응시하여 총 3,632장의 답안지가 제출되었다. 도산별과의 경위, 급제자들의 명단, 답안지는 같은해 『교남빈흥록(嶠南賓興錄)』이라는 책으로 간행되었다.

정조 20년(1796)에는 도산별과를 기념하기 위해 시험이 치러진 자리에 단을 마련하고, 당시 영의정이었던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이 비문을 지어 비석을 세웠다. 지금의 비석은 순조 24년(1824)에 비각을 새로 지으면서 고쳐 세운 것이다. 1975년 안동댐 건설 이후 원래 있던 자리에 10m 높이의 돌로 축대를 쌓아 올린 뒤 옛 건물과 비석을 원형대로 옮겨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