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공제명암(영월 무릉리 요선암 돌개구멍)"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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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폐위 직후 단종을 향한 충절을 지킨 생육신 원호, 조려와 이수형이 관직에 나가지 않을 것을 맹세한 뒤 이름을 새긴 바위다. 이들은 무릉계곡 요선정을 거점으로 영월에 유배된 단종을 찾아 문안 인사를 드리며, 안위를 근심했다고 전한다. 이 행적을 바위에 새겨 놓았다. | 단종 폐위 직후 단종을 향한 충절을 지킨 생육신 원호, 조려와 이수형이 관직에 나가지 않을 것을 맹세한 뒤 이름을 새긴 바위다. 이들은 무릉계곡 요선정을 거점으로 영월에 유배된 단종을 찾아 문안 인사를 드리며, 안위를 근심했다고 전한다. 이 행적을 바위에 새겨 놓았다. | ||
− | 이 바위는 1987년 무릉~운학 간 도로 확충 공사로 파괴되었다가 1990년 영월충절현창회가 원위치에서 서남쪽으로 백 보가량 떨어진 곳에 복원하였다. 삼공제명암은 요선정을 마주 보고 있다 | + | 이 바위는 1987년 무릉~운학 간 도로 확충 공사로 파괴되었다가 1990년 영월충절현창회가 원위치에서 서남쪽으로 백 보가량 떨어진 곳에 복원하였다. 삼공제명암은 요선정을 마주 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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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의 제6대 왕인 단종(재위 1452-1455)은 왕위를 빼앗긴 뒤 영월 지역으로 유배되어 세상을 떠났다. 세 충신은 단종을 향한 충절을 지키기 위해 관직에 나가지 않을 것을 맹세한 뒤 이곳에 이름을 새겼다. 또한 이들은 단종을 자주 찾아 문안 인사를 드리며 안위를 근심했다고 전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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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위는 1987년 도로 확충 공사로 파괴되었다가 1990년 원래의 위치에서 서남쪽으로 백 보가량 떨어진 곳에 복원하였다. | ||
2024년 4월 16일 (화) 17:03 판
삼공제명암 三公題名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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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안내판: 영월 무릉리 요선암 돌개구멍 |
해설문
국문
단종 폐위 직후 단종을 향한 충절을 지킨 생육신 원호, 조려와 이수형이 관직에 나가지 않을 것을 맹세한 뒤 이름을 새긴 바위다. 이들은 무릉계곡 요선정을 거점으로 영월에 유배된 단종을 찾아 문안 인사를 드리며, 안위를 근심했다고 전한다. 이 행적을 바위에 새겨 놓았다.
이 바위는 1987년 무릉~운학 간 도로 확충 공사로 파괴되었다가 1990년 영월충절현창회가 원위치에서 서남쪽으로 백 보가량 떨어진 곳에 복원하였다. 삼공제명암은 요선정을 마주 보고 있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이 바위에는 조선시대의 세 충신 원호, 조려, 이수형의 이름과 행적이 새겨져 있다.
조선의 제6대 왕인 단종(재위 1452-1455)은 왕위를 빼앗긴 뒤 영월 지역으로 유배되어 세상을 떠났다. 세 충신은 단종을 향한 충절을 지키기 위해 관직에 나가지 않을 것을 맹세한 뒤 이곳에 이름을 새겼다. 또한 이들은 단종을 자주 찾아 문안 인사를 드리며 안위를 근심했다고 전한다.
이 바위는 1987년 도로 확충 공사로 파괴되었다가 1990년 원래의 위치에서 서남쪽으로 백 보가량 떨어진 곳에 복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