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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문신 목서흠(1572-1652)과 부인 안동권씨의 합장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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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서흠은 1597년 음보로 관직에 나아갔고 1610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1623년 함경도 지역에서 어사로 활동하였고, 1637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인조(재위 1623-1649)를 호위하며 따랐다. 이후 개성유수와 예조참판 등 여러 관직을 지냈다. 1689년 아들 목내선(1617-1704)이 좌의정에 임명되면서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1675년 충정(忠貞)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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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분 앞에는 묘표, 혼유석, 향로석, 장명등이 있고 양옆에 동자석, 문인석, 망주석이 한 쌍씩 있다. 묘표는 1689년에 세운 것이다. 묘역 입구에는 목서흠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1671년에 세운 신도비가 있다. 신도비는 장방형 받침돌, 비문을 새긴 몸돌, 지붕돌로 이루어져 있다. 비문은 문신 조경(1586-1669)이 짓고, 조경의 조카 조위명(1640-1685)이 글씨를 썼으며, 몸돌 중앙 상단의 신도비 명칭은 명필 이정영(1616-1686)이 썼다.
  
  

2024년 2월 21일 (수) 12:28 판


충정공 목서흠 묘역
충정공 목서흠 묘역,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충정공 목서흠 묘역
한자 忠貞公 睦叙欽 墓域
주소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62번지
지정번호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27호
지정일 2009년 6월 25일
분류 유적건조물/무덤/무덤/기타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분묘 1基, 석물 9基, 토지 205.3㎡
웹사이트 충정공 목서흠 묘역,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목서흠(睦敍欽, 1572~1652)은 조선 후기 문신으로 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순경(舜卿), 호는 매계(梅溪)다. 이조참판 목첨의 아들이다. 선조 30년(1597) 음보*로 관직에 나아갔고 광해군 2년(1610) 알성문과에 급제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함경도선유어사로 활동하였고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위하며 따랐다. 인조 20년(1642) 개성유수를 거쳐 이듬해 한성부 좌윤‧우윤 그리고 예조참판과 지중추부사를 두루 지냈다. 숙종 15년(1689) 아들 목내선이 좌의정에 임명된 뒤 영의정으로 추증(追贈)되었고 시호(諡號)는 충정(忠貞)이다.

목서흠 묘는 단분(單墳) 합장묘로 봉분 하나에 부인 안동 권씨가 함께 묻혀 있다. 봉분 앞에 묘표(墓標), 혼유석(魂遊石), 향로석, 동자석 한 쌍과 망주석(望柱石) 한 쌍이 있다. 묘표는 1689년 영의정에 추증된 뒤에 다시 세워졌다. 신도비는 장방형 받침돌과 지붕 모양 덮개돌을 갖춘 방부개석 양식으로, 현종 12년(1671)에 세워졌다. 신도비의 비문은 좌찬성 조경(趙絅)이 짓고, 조경의 조카 조위명(趙威明)이 글씨를 썼으며, 명필로 알려진 이정영(李正英)이 전액*을 썼다.


  • 음보(蔭補): 조상의 덕으로 벼슬을 얻음
  • 전액(篆額): 전서체로 쓴 비의 명칭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조선시대의 문신 목서흠(1572-1652)과 부인 안동권씨의 합장묘이다.

목서흠은 1597년 음보로 관직에 나아갔고 1610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1623년 함경도 지역에서 어사로 활동하였고, 1637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인조(재위 1623-1649)를 호위하며 따랐다. 이후 개성유수와 예조참판 등 여러 관직을 지냈다. 1689년 아들 목내선(1617-1704)이 좌의정에 임명되면서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1675년 충정(忠貞)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봉분 앞에는 묘표, 혼유석, 향로석, 장명등이 있고 양옆에 동자석, 문인석, 망주석이 한 쌍씩 있다. 묘표는 1689년에 세운 것이다. 묘역 입구에는 목서흠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1671년에 세운 신도비가 있다. 신도비는 장방형 받침돌, 비문을 새긴 몸돌, 지붕돌로 이루어져 있다. 비문은 문신 조경(1586-1669)이 짓고, 조경의 조카 조위명(1640-1685)이 글씨를 썼으며, 몸돌 중앙 상단의 신도비 명칭은 명필 이정영(1616-1686)이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