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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23일 (목) 11:03 판


화순 임대정 원림
Imdaejeong Garden, Hwasun
화순 임대정 원림,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화순 임대정 원림
영문명칭 Imdaejeong Garden, Hwasun
한자 和順 臨對亭 園林
주소 전라남도 화순군 사평면 상사1길 48 일원 (사평리 601 일원)
국가유산 종목 명승 제89호
지정(등록)일 2012년 4월 10일
분류 자연유산/명승/역사문화경관
수량/면적 11,027㎡
웹사이트 화순 임대정 원림,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화순 임대정 원림은 사평 출신으로 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지낸 사애(沙厓) 민주현(閔冑顯, 1808~1882)이 1862(철종 13)년에 정자를 지어 조성한 원림이다.

민주현의 <임대정기(臨對亭記)>에 의하면 이곳은 풍광이 수려해서 선조 대의 문인인 고반(考槃) 남언기(南彦紀, 1534년∼?)가 정자를 지어 수륜대(垂綸臺)라 이름하고 원유 생활(園遊生活)을 하였으며, 은행대(銀杏臺)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황폐되었던 이곳을 사애 선생이 수림을 조성하고, 연못도 다듬고, 정자를 지어 임대정이라 하였다. 임대정은 송나라 주돈이의 ‘종조임수대려산(終朝臨水對廬山, 아침 내내 물가에서 여산을 대한다.)’이라는 시구에서 그 이름을 취하였다고 한다. 이는 민주현의 <임대정기>에 ‘수취종조임수대려산지구 명이임대(遂取終朝臨水對廬山之句 名以臨對)’라고 한 기록에서 알 수 있다.

사애 민주현이 고향 사평에 임대정을 건립한 것은 55세 때인 1862년이다. 44세 되던 1851년에 문과에 급제한 뒤 사간언 정언, 사한부 장령을 거쳐 54세 되던 1861년에 사헌부 집의를 제수받는다. 그런데 그해 10월에 <화도연명귀거래사(和陶淵明歸去來辭)>라는 글[부(賦)]을 짓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문집인 <사애집(沙厓集)> 권1에 ‘신유시월 자경하래이작(辛酉十月 自京下來而作, 신유년(1861, 철종 12) 10월에 서울에서 내려와 지었다.)’이라고 쓰여 있다.

임대정을 건립하면서 지은 <임대정기> 첫머리에는 ‘임술조하(壬戌肇夏)’라는 연기를 기록하고 있어 1862년 초여름에 지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작은 정자를 지어 더위를 가시게 하고자 한 칸 초가를 지었음(構小榭以爲消暑之計乎....構成一間草廬)을 적고 있어 민주현이 처음 건립할 당시에는 단칸 초가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新築小亭杏種陰 작은 정자를 살구나무 곁에 새롭게 지으니
箇中幽興倍難禁 곳곳의 그윽한 흥취 배가 됨을 금할 수 없네
碧臺間有待明到 푸른 누대 사이에서 밝아 오길 기다리고
爭席時看野老尋 자리 다투며 때때로 들에서 일하는 촌로를 바라보네

민주현은 다시 병조 참판으로 관직에 나아갔다가 1866년에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병인양요로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점령했다는 말을 듣고 밤낮으로 우분(憂憤)을 이기지 못하다가 마침내 십만 양병책(十萬養兵策)을 주장하는「청양병위이비완급지책(請養兵威以備緩急之策)」을 상소하였다.

임대정은 건립 이후, 때로는 은둔처로, 때로는 교류와 강학처로 활용되었으며 1922년에 기와 지붕으로 중건되었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고 서북쪽을 바라보고 있다. 후손 민용호(龍鎬, 1869~1922)가 지은 <임대정중건상량문>(신유년, 1921)과 민병승(丙承, 1866~?)의 <임대정중수기>(병자년, 1936)를 통하여 1921년에 중건 상량하여 1922년에 준공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를 주도한 이는 민대호, 민용호, 민긍호 등이다. 그리고 김문옥(金文鈺, 1897~1965)의 <임대정중건기>(갑술년, 1964)를 통하여 1964년에도 중건했음을 알 수 있다.

1985년에 전라남도 기념물 제69호로 지정되었다가 2012년 국가 지정 문화재인 명승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