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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 송씨 쌍충 정려는 송대립(宋大立, 1550~1597)과 송심(宋諶, 1590~1637) 부자를 기리기 위해 인조 22년(1644)에 내려진 정려이다. 조선시대에는 충신, 효자, 열녀 등에 대해 국가에서 정려를 내려 표창하였다. 쌍충 정려란 한 집안에서 두 명의 충신이 나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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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립은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의 휘하에서 동생인 송희립(宋希立, 1553~1623)과 함께 활약했으며,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고향인 흥양(興陽, 고흥의 옛 지명)에서 의병을 모아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송심은 병자호란 당시 북병사 이항(李沆, ?~1637) 등의 휘하에서 남한산성 구원에 참여하였다.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강화가 성립되자 자신이 거느리던 군사를 거느리고 철수하는 청나라 군대를 추격하였으며, 함경도 안변 지역에서 고군분투하다가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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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부자의 충절이 인정되어 나라에서 정려가 내려졌으며, 정려 현판을 보호하기 위해 숙종 30년(1704) 정려각이 세워졌다. 이후 정려각은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고, 지금의 건물은 1996년에 정비된 것이다. 정려각 안에는 왼쪽에 송대립의 정려 현판이, 오른쪽에 송심의 정려 현판이 걸려 있고, 이외에도 두 사람의 정려 사실이나 건물의 중수 사실을 기록한 현판 5매가 있다.
  
 
=='''문맥요소'''==
 
=='''문맥요소'''==

2021년 6월 21일 (월) 01:26 판


고흥 송씨 쌍충 정려
고흥 송씨 쌍충 정려,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고흥 송씨 쌍충 정려
한자 高興 宋氏 雙忠 旌閭
주소 전라남도 고흥군 동강면 마륜마서길 49-6
지정번호 전라남도 기념물 제110호
지정일 1987년 6월 1일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사우
수량/면적 일원
웹사이트 고흥 송씨 쌍충 정려,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쌍충각은 마륜리 서재동마을에 위치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순절한 송대립과 병자호란 떄 공을 세운 송심 부자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인조 22년(1644)에 명정을 포상받아 건립되었다.

송대립(1550-1597)은 임진왜란 때 이충무공의 휘하에서 당시 지도만호로 있던 아우 희립과 함께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고흥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활약하다가 순절하였다. 대립의 아들 심(1590-1637) 역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병자호란 때 이항의 휘하에서 분전하다 전사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915년에 중수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내부에 인조 22년(1644)에 명정받은 명정판액 2매와 1915년에 기우만이 찬한 중수기가 있다.

수정 국문

초고

이 건물은 충신 송대립(宋大立, 1550∼?)과 그의 아들인 송심(宋諶, 1590∼1637)을 기리는 정려이다. 정려는 일반적으로 국가의 명정(命旌)을 받아야만 건립할 수 있다. 명정은 나라에서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기리기 위해 이름이나 관직을 적은 것이다. 정려에 관한 자료는 대부분 인물에 관계된 것으로 후손들이 지역사회에서 유력한 성씨로 성장하는 과정과 밀접한 관련을 갖은 경우가 많아 주목되는 유교 유산이다.

송대립은 임진왜란 당시 1592년 (선조 25) 도원수 권율의 휘하에서 활동, 1597년(선조 35) 칠천량해전 이후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군관으로 활동하였다. 이순신의 『난중일기(亂中日記)』, 보물 제660호 「임란관련 고문서-첩보서목(捷報書目)」,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 등 다양한 사료에 기록되었을 만큼 임진왜란에서 괄목할만한 활동을 하다 순국하였다. 송심은 1614년(광해군 6) 무과에 급제하고 무관직을 겸임하다가 함흥진관병마절제도위(咸興鎭管兵馬節制都尉)의 자격으로 1637년(인조15) 병자호란 때 함경도 안변(安邊)의 남산역(南山驛) 전투에서 순국하였다.

이후 송심의 아들인 송문상(宋文祥,1631~1706)이 지었고, 송문상의 아들인 송필징(宋必徵, 1657~1730) 등의 노력으로 송대립, 송심 부자의 절의가 인정되 정려가 세워지게 되었다. 송필징의 아들 송정악(宋廷岳, 1697~1775)은 이후 이들의 행적을 기록한『송씨충효록(宋氏忠孝錄)』을 간행하기도 한다.

현재의 송씨쌍충정려 건물은 1736년(영조 12) 중수, 1946년과 1968년에 두 차례에 걸쳐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내부에는 송대립과 송심의 정려가 각각 있으며 해당 정려와 정려각에 대한 내력을 적은 기문(記問)으로 1710년 흥양현감 송내백(宋來栢, 1707~1710 재임)의 쌍충정려기, 1736년(영조 12) 유승(柳乘, 1677~?)의 쌍충정려중수기, 1752년(영조 28) 이의철(李宜哲, 1703~1778)의 충신송공부자정려기, 1908년 송재변(宋在變)의 여산송씨양세충정 중수상량문, 1915년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의 정려중수기가 있다.

초고 수정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활약하다 순국한 송대립(宋大立, 1550∼1597)과 병자호란 때 함경도에서 순국한 그의 아들 송심(宋諶, 1590∼1637)을 기리기 위한 정려와 정려를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정려각이다.

송대립은 1594년 무과에 급제해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휘하에서 동생인 송희립(宋希立, 1553~1623)과 함께 활약했으며,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고향인 흥양(興陽, 고흥의 옛 지명)에서 의병을 모아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그의 아들 송심은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북병사 이항(李沆) 등의 휘하에서 남한산성(南漢山城) 구원에 참여했으며, 도착 전 강화가 성립되자 자신이 거느리던 군사를 거느리고 본국으로 철수하는 청나라 군대를 추격해 함경도 안변(安邊)의 남산역(南山驛)에 이르러 고군분투하다가 전사하였다.

이후 부자의 충절이 인정되어 인조 22년(1644) 정려를 받았고, 정려 현판을 보호하기 위해 숙종 30년(1704)에 세워진 정려각은 후대에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重修)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1996년에 정비된 것이다.

내부 정면의 왼쪽에는 송대립의 정려 현판이, 오른쪽에는 송심의 정려 현판이 걸려있으며, 이외에도 두 사람의 정려 사실이나 건물의 중수 사실을 기록한 현판 5매가 있다.

이름인‘쌍충’은 한 집안에서 두 명의 충신이 나왔다는 뜻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대를 이어 국가에 충성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 중수 관련 - 민백이 가장 상세( 1737년, 1915년, 1946년, 1968년)하며 가장 최근(1968년) 중수 사실을 언급하고 있음.(국가문화유산포털 내 조사연구자료에도 '1737년에 1차 중수되고 1946년과 1968년 2차례에 걸쳐 중수되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되어 있음) / 국가문화유산포털 소재 이미지자료 참고시 96년에 보수공사가 실시되었던 것으로 보이므로 확인 필요함.
  • 정려 현판 위치는 두산백과 내 사진으로 유추하여 작성한 것. 지자체 확인 필요.
  • 이름에 대한 언급을 찾기는 어려우나 해당 의미로 추정해볼 수 있기에 문안에 추가함. - 확인 필요함.

1차 수정

고흥 송씨 쌍충 정려는 송대립(宋大立, 1550~1597)과 송심(宋諶, 1590~1637) 부자를 기리기 위한 인조 22년(1644)에 내려진 정려이다. 조선시대에는 충신, 효자, 열녀 등에 대해 국가에서 정려를 내려 표창하였다. 쌍충 정려란 한 집안에서 두 명의 충신이 나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활약하다 순국한 송대립(宋大立, 1550~1597)과 병자호란 때 함경도에서 순국한 그의 아들 송심(宋諶, 1590~1637)을 기리기 위한 정려와 정려를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정려각이다.

송대립은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의 휘하에서 동생인 송희립(宋希立, 1553~1623)과 함께 활약했으며,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고향인 흥양(興陽, 고흥의 옛 지명)에서 의병을 모아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송심은 병자호란이 당시 북병사 이항(李沆, ?~1637) 등의 휘하에서 남한산성 구원에 참여하였다.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강화가 성립되자 자신이 거느리던 군사를 거느리고 철수하는 청나라 군대를 추격하였으며, 함경도 안변 지역에서 고군분투하다가 전사하였다.

이후 부자의 충절이 인정되어 나라에서 정려가 내려졌으며, 정려 현판을 보호하기 위해 숙종 30년(1704) 정려각이 세워졌다. 이후 정려각은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고, 지금의 건물은 1996년에 정비된 것이다. 정려각 안에는 왼쪽에 송대립의 정려 현판이, 오른쪽에 송심의 정려 현판이 걸려있고, 이외에도 두 사람의 정려 사실이나 건물의 중수 사실을 기록한 현판 5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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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수정

고흥 송씨 쌍충 정려는 송대립(宋大立, 1550~1597)과 송심(宋諶, 1590~1637) 부자를 기리기 위해 인조 22년(1644)에 내려진 정려이다. 조선시대에는 충신, 효자, 열녀 등에 대해 국가에서 정려를 내려 표창하였다. 쌍충 정려란 한 집안에서 두 명의 충신이 나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송대립은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의 휘하에서 동생인 송희립(宋希立, 1553~1623)과 함께 활약했으며,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고향인 흥양(興陽, 고흥의 옛 지명)에서 의병을 모아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송심은 병자호란 당시 북병사 이항(李沆, ?~1637) 등의 휘하에서 남한산성 구원에 참여하였다.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강화가 성립되자 자신이 거느리던 군사를 거느리고 철수하는 청나라 군대를 추격하였으며, 함경도 안변 지역에서 고군분투하다가 전사하였다.

이후 부자의 충절이 인정되어 나라에서 정려가 내려졌으며, 정려 현판을 보호하기 위해 숙종 30년(1704) 정려각이 세워졌다. 이후 정려각은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고, 지금의 건물은 1996년에 정비된 것이다. 정려각 안에는 왼쪽에 송대립의 정려 현판이, 오른쪽에 송심의 정려 현판이 걸려 있고, 이외에도 두 사람의 정려 사실이나 건물의 중수 사실을 기록한 현판 5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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