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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열사는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조선시대의 무신 진무성(陳武晟, 1566~?)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고종 19년(1882)에 건립된 사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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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무성은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이 지휘했던 당포해전(1592), 옥포해전(1592) 등의 여러 전투와 제2차 진주성전투(1593)에 참전하였다. 임진왜란 때의 전공으로 공신에 책봉되었으며, 전쟁이 끝난 후인 선조 32년(1599)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무관직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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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무성은 본래 창원박씨 가문의 박유원(朴由元, 1388~1450), 박태수(朴鮐壽, 1475~1593), 박홍세(朴弘世, 1550~1598) 세 사람과 함께 순조 26년(1826) 고흥군 대서면 상남리에 세워진 용강사(龍岡祠)에 배향되었다. 그러나 용강사는 고종 5년(1868)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거되었고, 이후 지역 유림들과 후손들이 힘을 모아 그가 태어난 신송리 동신마을에 무열사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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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내에는 외삼문, 강당인 저존재(著存齋), 유물들이 보관되어 있는 유물각, 내삼문, 사당이 있고, 진무성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건물들은 1941년과 1971년에 고쳐 지었으며, 매년 봄에 진무성을 기리는 제사를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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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 안에는 숙종 12년(1686) 왕이 하사한 진무성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이밖에도 무열사에는 임진왜란 때 진무성이 직접 사용했다고 전하는 칠성검, 일산 등의 유물과 총 79장의 고문서가 소장되어 있다. 고문서 중에는 진무성이 무과에 급제하여 받은 교지와 무열사의 창건 동기나 건립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지역 유생들의 상서(上書) 및 이에 대한 관의 입안(立案) 등이 포함되어 있다.
  
 
=='''문맥요소'''==
 
=='''문맥요소'''==

2021년 6월 21일 (월) 01:25 판


고흥 무열사
고흥 무열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고흥 무열사
한자 高興 武烈祠
주소 전라남도 고흥군 두원면 서신길 53-12
지정번호 전라남도 기념물 제58호
지정일 1981년 10월 20일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사우
수량/면적 일원
웹사이트 고흥 무열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무열사는 1592년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 휘하에 진주해전에서 큰 공을 세운 진무성(1566-1638) 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1826년에 세워졌다. 본래 이름은 용강사였고 고흥군 대서면 상남리에 위치했었다.

고종 5년(1868)에 서원, 사우 일제 철폐령에 의해 철거되었다. 고종 19년(1882), 후손들의 도움으로 그의 고향인 동신마을로 사당이 옮겨지고 진무성 장군의 영정이 안치되고 이름이 무열사로 바뀌었다. 사당은 본당과 내삼문으로 구성되어 있고, 진무성 장군의 칠성검이 보관되어 있다. 봄과 가을에 두 번의 제사를 지낸다.

수정 국문

초고

이곳은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1598)이 일어났을 때 옥포 및 당포 해전 등에서 장교급 무관인 군관(軍官)의 자격으로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을 도와 전공을 세운 공으로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된 진무성(陳武晟, 1566~?)의 사우(祠宇)이다.

진무성은 임진왜란이 끝나자 1599년(선조 32) 무과에 급제하여 광해조와 인조대에 걸쳐 여러 무관직을 역임하였고 사후 종2품에 해당하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추증되었다.

무열사는 본래 1826년(순조 26)에 용강사(龍岡祠)로 창건되었다. 창건 당시 제향 인물은 세종조에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역임한 박유원(朴由元, 1388~1450), 훈련원첨정(訓鍊院僉正)을 역임한 박태수(朴鮐壽, 1475~1593), 정유재란(丁酉再亂, 1597~1598)에서 전공을 세우고 순국하여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된 박홍세(朴弘世, 1550~1598), 진무성 등 4인이었다. 앞의 세 명은 모두 창원박씨(昌原朴氏)이고 진무성은 여양진씨(驪陽陳氏)로 모두 고흥에 세거지를 둔 까닭에 용강사에 함께 제향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후 1868년(고종 5)에 전국적인 원우(院宇) 훼철의 여파에 헐리게 되었다. 이후 용강사는 1873년(고종 10)에 창원박씨 재실(齋室)의 형태로 복원되었다가 1893년 이건하여 박유원, 박태수, 박홍세를 제향하는 사우의 형태를 복원하였다. 반면 1882년(고종 19)에 원래 용강사가 있던 자리에 진무성을 제향하는 사우인 무열사를 재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무열사와 관련된 유물은 진무성의 유품인 칠성검(七星劍)·일산(日傘)·철갑·투구·활·화살촉 등이 소장되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칠성검(가로 91㎝×세로 3.5㎝)과 일산(길이 240㎝)의 일부만이 남아있다. 특히 칠성검은 진무성이 임진왜란 때 직접 사용하였던 것이라고 한다.

관련 고문서는 진무성이 1599년 무과에 급제하여 받은 교지를 비롯하여 1614년, 1633년, 1647년(2점) 각기 관직을 제수받았던 교지(敎旨, 10점)와 소지(所志, 28점), 상서(上書, 9점), 명문(明文, 3점), 입안(立案, 1점), 호구단자(戶口單子, 16점), 통문(通文, 12점) 등 총 79장의 고문서가 소장되어 있다. 특히 소지의 경우 진무성에게 시호를 달라는 청원서와 진무성이 배향된 사우(당시 용강사)에 사액을 내려달라는 흥양 유생들의 상서와 통문이 일괄적으로 보존되어 있고, 이에 대한 관의 입안이 함께 소장되어 있기 때문에 무열사의 창건 동기나 건립과정이 자세히 나타나 있어 사우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한편 무열사 내부에는 진무성의 영정이 있다. 이것은 1686년 숙종이 공의 충절을 찬양하기 위하여 하사한 것으로 규모는 가로 73㎝, 세로 103㎝이다. 그밖에 복설 이후 일제하에 이루어진 기문류의 현란으로 「무열사기(武烈祠記)」(1947년), 「송계영당중수기(松溪影堂重修記)」(1947년) 등이 남아 있으며, 1974년에 간행한 무열사지(武烈祠誌) 1책이 있다.

초고 수정

무열사는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1598) 때 공을 세운 조선시대의 무신 진무성(陳武晟, 1566~?)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진무성은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이 지휘했던 당포해전(唐浦海戰, 1592)·옥포해전(玉浦海戰, 1592) 등의 여러 전투와 제2차 진주성 싸움(1593년)에 참전하였으며, 전란 이후인 1599년(선조 32)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무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는 본래 창원박씨(昌原朴氏) 가문의 박유원(朴由元, 1388~1450), 박태수(朴鮐壽, 1475~1593),박홍세(朴弘世, 1550~1598) 세 사람과 함께 순조 26년(1826) 고흥군 대서면 상남리에 세워진 용강사(龍岡祠)에 배향되었는데, 용강사가 고종 5년(1868) 서원철폐령에 의해 헐린 후, 1882년 지역 유림들과 후손들이 힘을 모아 그가 태어난 신송리 동신마을에 사당을 재건하였다.

경내에는 외삼문, 강당인 저존재(著存齋), 유물들이 보관되어 있는 유물각, 내삼문, 사당이 있고, 진무성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건물들은 1941년과 1971년에 고쳐 지어졌으며, 매년 봄에 진무성을 기리는 제사를 지낸다.

사당 안에는 1686년 숙종이 하사한 진무성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영정의 규모는 가로 73㎝, 세로 103㎝이다.

무열사에는 영정 외에도 임진왜란 때 진무성이 직접 사용했다고 전하는 칠성검(七星劒, 가로 91㎝×세로 3.5㎝)을 비롯해 일산(日傘, 길이 240㎝)의 일부, 총 79장의 고문서가 소장되어 있다. 고문서 중에는 진무성이 1599년 무과에 급제하여 받은 교지(敎旨)와 무열사의 창건 동기나 건립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지역 유생들의 상서(上書) 및 이에 대한 관의 입안(立案) 등이 포함되어 있다.

  • 사우 철폐 후 1873년에 박씨 가문에서 재실(齋室)을 복원해 세 사람의 위패를 모셨고, 이 재실을 1893년 이건하였다고 함(종친회 설명 등 참조) - 어디로 이건했는지 확인하지 못했음.
  • 초고에는 ' 원래 용강사가 있던 자리'라고 했는데, 지자체 제공 기존 국문의 내용(용강사는 상남리에 있었고, 후손들의 도움으로 그의 고향인 동신마을로 사당이 옮겨졌다는 내용)이 맞다고 봐야 할 듯해 다시 수정함.

1차 수정

무열사는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조선시대의 무신 진무성(陳武晟, 1566~?)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고종 19년(1882)에 건립된 사당이다.

진무성은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이 지휘했던 당포해전(1592), 옥포해전(1592) 등의 여러 전투와 제2차 진주성전투(1593)에 참전하였으며, 전란 이후인 선조 32년(1599)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무관직을 역임하였다.

진무성은 본래 창원박씨 가문의 박유원(朴由元, 1388~1450), 박태수(朴鮐壽, 1475~1593), 박홍세(朴弘世, 1550~1598) 세 사람과 함께 순조 26년(1826) 고흥군 대서면 상남리에 세워진 용강사(龍岡祠)에 배향되었다. 그러나 용강사는 고종 5년(1868)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거되었고, 이후 지역 유림들과 후손들이 힘을 모아 그가 태어난 신송리 동신마을에 무열사를 세웠다.

경내에는 외삼문, 강당인 저존재(著存齋), 유물들이 보관되어 있는 유물각, 내삼문, 사당이 있고, 진무성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건물들은 1941년과 1971년에 고쳐 지었으며, 매년 봄에 진무성을 기리는 제사를 지낸다.

사당 안에는 숙종 12년(1686) 왕이 하사한 진무성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이밖에도 무열사에는 임진왜란 때 진무성이 직접 사용했다고 전하는 칠성검, 일산 등의 유물과 총 79장의 고문서가 소장되어 있다. 고문서 중에는 진무성이 무과에 급제하여 받은 교지와 무열사의 창건 동기나 건립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지역 유생들의 상서(上書) 및 이에 대한 관의 입안(立案) 등이 포함되어 있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매년 봄에 진무성을 기리는 제사를 지낸다. -> 일반적으로 봄과 가을에 제향을 올리는데, 현재는 봄에만 올리는 것인지 사실 여부 확인 필요.
  2. 분야별 자문위원 2
    •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조선시대의 무신 진무성->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진무성
    • 제2차 진주성전투(1593)에 참전하였으며, 전란 이후인 선조 32년(1599)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무관직을 역임하였다.-> 제2차 진주성전투(1593)에 참전하였다. 임진왜란 때의 전공으로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전란 이후인 선조 32년(1599) 무과에 급제한 뒤 여러 무관직을 역임하였다.
    • 진무성은 본래 창원박씨 가문의 박유원(朴由元, 1388~1450), 박태수(朴瑞壽, 1475~1593), 박홍세(朴弘世, 1550~1598) 세 사람과 함께 순조 26년(1826) 고흥군 대서면 상남리에 세워진 용강사(龍岡祠)에 배향되었다. 그러나 용강사는 고종 5년(1868)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거되었고, 이후 지역 유림들과 후손들이 힘을 모아 그가 태어난 신송리 동신마을에 무열사를 세웠다. -> 진무성은 당초 용강사(龍岡祠)에 배향되었다가, 용강사가 고종 5년(1868) 서원철폐령 에 의해 철거된 뒤 고종 19년(1882) 무열사가 세워져 이곳에 배향되었다.
  3.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수정사항 없음.

2차 수정

무열사는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조선시대의 무신 진무성(陳武晟, 1566~?)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고종 19년(1882)에 건립된 사당이다.

진무성은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이 지휘했던 당포해전(1592), 옥포해전(1592) 등의 여러 전투와 제2차 진주성전투(1593)에 참전하였다. 임진왜란 때의 전공으로 공신에 책봉되었으며, 전쟁이 끝난 후인 선조 32년(1599)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무관직을 역임하였다.

진무성은 본래 창원박씨 가문의 박유원(朴由元, 1388~1450), 박태수(朴鮐壽, 1475~1593), 박홍세(朴弘世, 1550~1598) 세 사람과 함께 순조 26년(1826) 고흥군 대서면 상남리에 세워진 용강사(龍岡祠)에 배향되었다. 그러나 용강사는 고종 5년(1868)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거되었고, 이후 지역 유림들과 후손들이 힘을 모아 그가 태어난 신송리 동신마을에 무열사를 세웠다.

경내에는 외삼문, 강당인 저존재(著存齋), 유물들이 보관되어 있는 유물각, 내삼문, 사당이 있고, 진무성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건물들은 1941년과 1971년에 고쳐 지었으며, 매년 봄에 진무성을 기리는 제사를 지낸다.

사당 안에는 숙종 12년(1686) 왕이 하사한 진무성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이밖에도 무열사에는 임진왜란 때 진무성이 직접 사용했다고 전하는 칠성검, 일산 등의 유물과 총 79장의 고문서가 소장되어 있다. 고문서 중에는 진무성이 무과에 급제하여 받은 교지와 무열사의 창건 동기나 건립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지역 유생들의 상서(上書) 및 이에 대한 관의 입안(立案) 등이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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