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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9일 (수) 10:53 판


아곡 박수량 선생 생가 및 부조묘
대표명칭 아곡 박수량 선생 생가 및 부조묘
한자 莪谷 朴守良 先生 生家 및 不祧廟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기



해설문

국문

이곳은 박수량 선생의 생가가 있던 곳으로 현재는 부조묘(不祧廟)*가 지어져 있다. 정혜공 아곡 박수량(1491~1554) 선생은 명종 때 이름난 신하로 중종 9년(1514)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후에 38년 동안 호조·예조·형조·공조, 한성부판윤(정2품, 지금의 서울시장), 의정부우참찬(정2품), 함경도·전라도 관찰사 등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다.

선생의 시호**는 정혜(貞惠)다. 정(貞, 곧을 정)은 ‘청렴결백하였다’라는 청백수절(淸白守節)을 의미하고, 혜(惠, 은혜 혜)는 ‘백성을 사랑하여 백성이 친부모처럼 따랐다’라는 애민호여(愛民好與)를 뜻한다. 시호만 보더라도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청백리***로 선정된 선생의 청렴한 관직 생활상을 짐작할 수 있다.

선생의 청렴결백한 생활에 대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명종 임금은 선생의 청렴결백한 생활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암행어사를 선생의 부모가 살고 계신 이곳에 보냈는데, 암행어사는 “선생의 고향 집은 비가 새는 초가이며, 굴뚝에서는 한 달 중 반은 연기가 올라오지 않는다.”라고 보고하였다. 명종 임금은 이런 선생의 청렴함을 기리기 위해 고향인 아곡리에 99칸짜리 청백당(淸白堂)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선생이 한양에서 돌아가신 후 고향에 내려올 장례비조차 없자 명종 임금은 장례비를 지원했다. 그리고 묘비(墓碑)를 내려보내면서 “박수량의 청백함을 새삼스럽게 비에 새기는 것은 그의 청렴함을 잘못 서술하는 결과가 될지 모르니 비문 없이 그대로 세워라”하여 선생의 묘 앞에는 비문 없는 백비(白碑)가 세워졌다. 박수량 백비는 황룡면 금호리에 있고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후손들은 선생의 생가였던 이곳에 부조묘와 재실****을 짓고, 청백당이란 현판을 걸어 선생의 청렴 정신을 지금까지 기리고 있다.

명종 임금이 하사하신 99칸 집 청백당은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졌다고 전해진다. 장성군은 이곳에서 가까운 홍길동테마파크에 99칸 집을 재현하여 지어 ‘청백당’ 현판을 걸고, ‘청백한옥’이라는 이름으로 한옥체험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그 앞에는 박수량 선생의 유허비*****와 하마석******이 있다.


  • 부조묘(不祧廟): 나라에 큰 공훈이 있거나 도덕성과 학문이 높으신 분의 신위를 모시는 사당
  • 시호(諡號): 벼슬한 사람이나 관직에 있던 선비들이 죽은 뒤에 그 행적에 따라 임금으로부터 받은 이름
  • 청백리(淸白吏): 청렴결백한 관리
  • 재실(齋室):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은 집
  • 유허비(遺墟碑):  선현의 자취가 있는 곳을 길이 후세에 알리거나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비
  • 하마석(下馬石): 말이나 가마를 타고 내릴 때 이용하는 디딤돌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