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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https://www.namhae.go.kr/town/Index.do?c=TW1005020300 남해 대방산 봉수대], 남해군 창선면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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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경상남도 남해군 창선면 옥천리 산75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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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대는 낮에는 연기(燧)로, 밤에는 횃불(烽)을 들어 정해진 신호를 보내는 근대 이전의 군사 통신시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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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전국의 봉수망을 통해 중앙으로 정보가 전달되었다. 다섯 개의 직봉을 중심으로 직봉 사이에 간봉을 두기도 하였으며, 신호가 잘 보이도록 산봉우리의 시야가 트인 곳에 설치했다. 봉수는 평화로울 때 1개, 적이 나타나면 2개, 적이 경계에 접근하면 3개, 경계를 침범하면 4개, 경계에서 아군과 전투를 벌이면 5개의 신호를 올렸다. 이러한 제도는 1894년 근대통신수단이 도입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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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산(해발 468m) 정상에 위치한 이 봉수대는 고려 중엽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래(오늘날의 부산)와 서울을 연결하는 간봉 제2거 노선에 속해있으며, 동쪽의 금산 봉수대에서 신호를 받아 북쪽의 사천 각산 봉수대로 연결하였다. 연대와 연통은 2000년대 들어 복원되었다.
  
 
=='''문맥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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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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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해대방산봉수대 (南海臺方山烽燧臺),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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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해대방산봉수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333802480000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33380248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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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해대방산봉수대, 두산백과. https://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978516  
* 남해대방산봉수대 (南海臺方山烽燧臺),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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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978516
 
  
  

2021년 4월 24일 (토) 00:35 판


남해 대방산 봉수대
남해 대방산 봉수대, 남해군 창선면 홈페이지.
대표명칭 남해 대방산 봉수대
한자 南海 臺方山 烽燧臺
주소 경상남도 남해군 창선면 옥천리 산75번지
지정번호 경상남도 기념물 제248호
지정일 2003년 6월 12일
분류 유적건조물/교통통신/통신/봉수
관리자 남해군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남해 대방산 봉수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봉수(烽燧)는 높은 산에 올라가서 밤에는 횃불(烽)로, 낮에는 연기(燧)로 급한 소식을 전하던 전통시대의 통신 제도이다. 이 제도는 처음에 외적의 침입을 알리는 군사적 목적에서 실시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기록상 고려 중기(12,3세기)에 이 제도가 나타나지만, 실제로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실시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봉수제가 체계적으로 정비된 때는 왜구의 침입이 극심했던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 이후였다. 대방산 산정부(山頂部)에 위치한 대방산 봉수대는 고려 명종(明宗, 1171~1197)때 설치되어 조선시대까지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봉수대는 조선시대 다섯 곳의 봉수로(烽燧路) 가운데서 동래(東萊)에서 서울로 연결되는 제 2봉수로에 속한 것으로, 남해 금산봉수대로부터 연결받은 봉수를 북쪽의 사천 각산(角山) 봉수대로 연결하고 있다. 현재 봉수대의 원형은 찾을 수 없지만, 이곳이 봉수대 자리였음을 알려주는 지름 13m, 높이 3m의 석축과 연대로 추정되는 유지(遺址), 그리고 건물 터가 남아 있다.

수정 국문

초고

봉수대는 횃불과 연기를 이용하여 급한 소식을 전하던 옛날의 통신수단으로 높은 산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경상남도 남해군 창선면 옥천리 산75번지의 대방산에 설치되어 있는 봉수대이다. 산 정상에서 적의 동태를 살피고 인근 지역에 연락하기 위한 수단으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금산 봉수대에서 받아 사천의 각산 봉수대로 이어주는 중계지의 역할을 하였다.

대방산 봉수대의 벽은 흙과 돌을 섞어 만들어졌으며 높이 약 8.6m, 폭 약 3.6m인 망대가 남아 있다. 대방산 봉수대와 관련한 기록이 『경상남도지리지(慶尙南道地理志)』에 처음 보인다.

1차 수정

봉수대는 낮에는 연기(燧)로, 밤에는 횃불(烽)을 들어 정해진 신호를 보내는 근대 이전의 군사 통신시설이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의 봉수망을 통해 중앙으로 정보가 전달되었다. 다섯 개의 직봉을 중심으로 직봉 사이에 간봉을 두기도 하였으며, 신호가 잘 보이도록 산봉우리의 시야가 트인 곳에 설치했다. 봉수는 평화로울 때 1개, 적이 나타나면 2개, 적이 경계에 접근하면 3개, 경계를 침범하면 4개, 경계에서 아군과 전투를 벌이면 5개의 신호를 올렸다. 이러한 제도는 1894년 근대통신수단이 도입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대방산(해발 468m) 정상에 위치한 이 봉수대는 고려 중엽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래(오늘날의 부산)와 서울을 연결하는 간봉 제2거 노선에 속해있으며, 동쪽의 금산 봉수대에서 신호를 받아 북쪽의 사천 각산 봉수대로 연결하였다. 연대와 연통은 2000년대 들어 복원되었다.

문맥요소

Nodes

ID Class Label Description
남해_대방산_봉수대 Object 남해_대방산_봉수대
남해_금산_봉수대 Object 남해_금산_봉수대
경상남도지리지 Record 경상남도지리지(慶尙南道地理志) 대방산 봉수대와 관련한 기록이 『경상남도지리지(慶尙南道地理志)』에 처음 보인다
J38-0248-0000 Heritage (경상남도_기념물_제248호)남해_대방산_봉수대 경상남도 기념물 제248호로 지정되어 있다.

Lin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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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_대방산_봉수대 J38-0248-0000 isDesignatedAs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