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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대는 횃불과 연기를 이용하여 급한 소식을 전하던 옛날의 통신수단으로 높은 산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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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남해군 창선면 옥천리 산75번지의 대방산에 설치되어 있는 봉수대이다. 산 정상에서 적의 동태를 살피고 인근 지역에 연락하기 위한 수단으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금산 봉수대에서 받아 사천의 각산 봉수대로 이어주는 중계지의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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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산 봉수대의 벽은 흙과 돌을 섞어 만들어졌으며 높이 약 8.6m, 폭 약 3.6m인 망대가 남아 있다. 대방산 봉수대와 관련한 기록이 『경상남도지리지(慶尙南道地理志)』에 처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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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4월 22일 (목) 09:44 판


남해대방산봉수대
남해 대방산 봉수대, 남해군 창선면 홈페이지.
대표명칭 남해대방산봉수대
한자 南海臺方山烽燧臺
주소 경상남도 남해군 창선면 옥천리 산75번지
지정번호 경상남도 기념물 제248호
지정일 2003년 6월 12일
분류 유적건조물/교통통신/통신/봉수
관리자 남해군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남해 대방산 봉수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봉수(烽燧)는 높은 산에 올라가서 밤에는 횃불(烽)로, 낮에는 연기(燧)로 급한 소식을 전하던 전통시대의 통신 제도이다. 이 제도는 처음에 외적의 침입을 알리는 군사적 목적에서 실시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기록상 고려 중기(12,3세기)에 이 제도가 나타나지만, 실제로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실시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봉수제가 체계적으로 정비된 때는 왜구의 침입이 극심했던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 이후였다. 대방산 산정부(山頂部)에 위치한 대방산 봉수대는 고려 명종(明宗, 1171~1197)때 설치되어 조선시대까지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봉수대는 조선시대 다섯 곳의 봉수로(烽燧路) 가운데서 동래(東萊)에서 서울로 연결되는 제 2봉수로에 속한 것으로, 남해 금산봉수대로부터 연결받은 봉수를 북쪽의 사천 각산(角山) 봉수대로 연결하고 있다. 현재 봉수대의 원형은 찾을 수 없지만, 이곳이 봉수대 자리였음을 알려주는 지름 13m, 높이 3m의 석축과 연대로 추정되는 유지(遺址), 그리고 건물 터가 남아 있다.

수정 국문

초고

봉수대는 횃불과 연기를 이용하여 급한 소식을 전하던 옛날의 통신수단으로 높은 산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경상남도 남해군 창선면 옥천리 산75번지의 대방산에 설치되어 있는 봉수대이다. 산 정상에서 적의 동태를 살피고 인근 지역에 연락하기 위한 수단으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금산 봉수대에서 받아 사천의 각산 봉수대로 이어주는 중계지의 역할을 하였다.

대방산 봉수대의 벽은 흙과 돌을 섞어 만들어졌으며 높이 약 8.6m, 폭 약 3.6m인 망대가 남아 있다. 대방산 봉수대와 관련한 기록이 『경상남도지리지(慶尙南道地理志)』에 처음 보인다.

1차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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