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오산리 석불입상"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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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출처= | + | |사진출처="[http://www.newstower.co.kr/news/articleView.html?idxno=63823 경기남부 편 - 반석산을 중심으로, ‘노작 홍사용 문학관’과 ‘화성 오산리 석불입상’]", 뉴스타워, 2019.03.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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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Stone Standing Buddha in Osan-ri, Hwaseong | |영문명칭=Stone Standing Buddha in Osan-ri, Hwaseong |
2021년 4월 10일 (토) 03:46 판
화성 오산리 석불입상 Stone Standing Buddha in Osan-ri, Hwaseo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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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화성 오산리 석불입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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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Stone Standing Buddha in Osan-ri, Hwaseong |
주소 | 경기도 화성시 반송동 108 |
지정(등록) 종목 | 향토문화재(유형) 제18호 |
지정(등록)일 | 2019년 10월 2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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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오산리 석불 입상은 동탄초등학교에서 서쪽으로 약 300m 떨어져 있었던 자라매산 아래에 있었다. 동탄신도시가 개발되면서 현재 위치로 이전하여 복원하였다. 이 석불은 머리에 둥근 모자 같은 보개(寶蓋)를 착용하였으며 얼굴은 긴 타원형이다. 이마 중앙에는 광명을 상징하는 백호가 크게 조각되어 있으며 목에는 불상에서 주로 보이는 주름인 삼도가 있다. 그리고 두 손은 연꽃 봉오리로 알려진 지물을 잡고 있다. 두 손으로 지물을 잡고 있는 불상은 조선 전기의 불상에서 주로 확인된다. 오산리 석불 입상이 입고 있는 옷은 일반적인 불상의 옷이 아니라 마치 왕릉이나 사대부 묘 앞의 문석인이 입는 옷 모양과 같다. 이러한 모습의 불상이 제작된 이유는 왕릉이나 사대부 묘 석상을 조성한 장인들이 불상 제작에 참여하였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오산리 석불 입상의 팔 아래 옷 주름은 유려하고 자연스럽다. 이러한 형태의 옷 주름이 유행한 시기는 왕릉 문석인의 크기가 대형화되기 이전인 15세기 후반경이다. 또한 이 석불이 착용하고 있는 폭이 두껍고 지름이 짧은 원형 보개의 경우 주로 15세기 불상에서 유행한 형태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점을 통하여 오산리 석불 입상은 15세기 후반경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화성 오산리 석불 입상에서 북쪽으로 약 12km 떨어진 용인시 기흥구 마북리에도 무덤 앞 석인상과 비슷한 형태의 조선 전기 석불 입상이 있다. 화성 오산리 석불 입상과 마북리 석불 입상은 모두 교통로에 서 있었다. 이 석불들은 행인들이 안전을 기원하는 신앙의 대상이었으며 동시에 이정표 역할도 하였다. 이처럼 화성 오산리 석불 입상은 조선 전기 불교 신앙의 형태와 교통로의 변화 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문화재이다.
영문
Stone Standing Buddha in Osan-ri, Hwase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