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원 금당터(익산 미륵사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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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당(金堂)은 불상을 모신 법당으로 사찰을 구성하는 중심 건물이다. 금색의 불상을 모셨다는 설과 건물 내부를 금색으로 칠했다는 설에서 명칭의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미륵삼존이 나타나자 연못을 메우고 탑과 더불어 금당을 세 곳에 두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발굴조사에서 삼원(三院)의 가람 속에 각각 금당이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곳은 삼원가람의 동원으로 금당이 있었던 곳이다. 삼원에 있는 금당 터 중에서 가장 많은 수의 기단부 석재가 남아 있어 원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2층으로 구성된 기단의 남북쪽에 계단이 있고, 기단 내부에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의 초석이 놓여 있다. 초석은 높이가 약 1m 정도로 높고, 윗부분에 다른 석재나 목재를 수평으로 끼워 넣을 수 있는 홈이 있다. 높은 초석으로 인해 금당 바닥에는 빈공간이 만들어진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신라 문무왕이 용이 되어 드나들었다는 경주 감은사 금당 구조와 유사한 점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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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31일 (일) 19:56 판
동원 금당터 東院 金堂址 Main Worship Hall Site of the East Courtyar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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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안내판: 익산 미륵사지 |
해설문
국문
금당(金堂)은 불상을 모신 법당으로 사찰을 구성하는 중심 건물이다. 금색의 불상을 모셨다는 설과 건물 내부를 금색으로 칠했다는 설에서 명칭의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미륵삼존이 나타나자 연못을 메우고 탑과 더불어 금당을 세 곳에 두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발굴조사에서 삼원(三院)의 가람 속에 각각 금당이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곳은 삼원가람의 동원으로 금당이 있었던 곳이다. 삼원에 있는 금당 터 중에서 가장 많은 수의 기단부 석재가 남아 있어 원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2층으로 구성된 기단의 남북쪽에 계단이 있고, 기단 내부에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의 초석이 놓여 있다. 초석은 높이가 약 1m 정도로 높고, 윗부분에 다른 석재나 목재를 수평으로 끼워 넣을 수 있는 홈이 있다. 높은 초석으로 인해 금당 바닥에는 빈공간이 만들어진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신라 문무왕이 용이 되어 드나들었다는 경주 감은사 금당 구조와 유사한 점이 있다.
영문
Main Worship Hall Site of the East Courtya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