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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 ===국문=== | ||
− | 해발 828m 화산 정상부에 | + | 산성은 산 위에 쌓은 성을 말한다. 화산산성은 해발 828m 화산 정상부에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막기 위해 조선 후기에 쌓았다. 둘레는 약 9,300보, 높이가 10척으로 기록되어 있다. |
− | + | 조선 숙종 35년(1709)에 병마절도사 윤숙이 군대를 주둔시키기 위해 동쪽과 서쪽, 그리고 남쪽과 북쪽 사방 문의 기초 공사를 시작하였다. 성벽을 쌓기 위해 돌로 된 재료를 모으고 수구문(水口門)*을 쌓던 중 흉년과 질병이 겹쳐 백성들에게 계속 부역을 시킬 수 없어 공사가 중지되었다. 그 후 계속 지금의 상태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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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재 북문과 수구문은 성을 공사하던 옛 모습 그대로 흔적이 남아 있다. 북문은 화강석을 다듬어 만든 무지개 모양인데, 주위의 성벽은 높이 4m 내외, 폭 5m이다. 계곡을 관통하는 성벽 밑에 낸 수구문은 암반 위에 넓게 뜬 돌을 층층이 쌓아 만든 2층 구조이다. 1층은 넓은 2칸, 2층은 좁고 작은 3칸으로 만들어 배수량을 조절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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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중기 이후 유행한 2층 수구의 형태, 조선 후기 성문과 성벽 등 성을 쌓던 기법과 공사의 순차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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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수구문: 성안의 물이 성 밖으로 흘러나가는 수구에 만든 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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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 ===영문=== | ||
+ | '''Hwasansanseong Fortress''' | ||
===영문 해설 내용=== | ===영문 해설 내용=== | ||
− | 화산산성은 화산 | + | 화산산성은 화산(해발 828m) 정상부를 둘러 돌로 쌓은 성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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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나 흉년과 전염병 등으로 인해 공사가 중지되었고, 윤숙이 다른 지역으로 근무지를 옮겨가면서 더 진행되지 못하고 그대로 방치되었다. | + | 외적의 침입을 막고 군대를 주둔시키기 위해 1709년 병마절도사 윤숙이 주도하여 성을 쌓기 시작했다. 그러나 흉년과 전염병 등으로 인해 공사가 중지되었고, 윤숙이 다른 지역으로 근무지를 옮겨가면서 공사가 더 진행되지 못하고 그대로 방치되었다. |
− | + | 현재 네 방향의 성문 기초, 배수를 위해 설치한 수구문 1기, 성벽 일부가 남아있으며, 이 중 북문과 수문은 1979년에 보수하였다. | |
− | 북문은 화강암을 다듬어 만든 | + | 북문은 화강암을 다듬어 만든 아치형 문이고, 양옆의 성벽은 높이 4m 내외, 폭 5m이다. 2층으로 만들어진 수구문은 아래층은 넓게, 위층은 좁게 만들어 배수량을 조절할 수 있도록 했으며, 이는 조선 후기에 유행한 형태이다. |
− | + | 조선 후기의 성을 쌓던 기법과 공사의 과정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 |
− | ==''' | + | =='''참고자료'''== |
*김상조의 문화유산답사기 <14> 군위 화산산성, 대경일보, 2020.1.27. 기사 http://www.dk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03577 -> 기본 정보 재확인 / 지금은 군사지역이라 내부 확인 어려움, | *김상조의 문화유산답사기 <14> 군위 화산산성, 대경일보, 2020.1.27. 기사 http://www.dk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03577 -> 기본 정보 재확인 / 지금은 군사지역이라 내부 확인 어려움, | ||
2020년 10월 1일 (목) 06:28 판
화산산성 Hwasansanseong Fortres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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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산산성,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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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화산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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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Hwasansanseong Fortress |
한자 | 華山山城 |
주소 | 경북 군위군 고로면 화북리 산229-1번지 외 3필 |
국가유산 종목 | 경상북도 기념물 제47호 |
지정(등록)일 | 1984년 5월 21일 |
분류 | 유적건조물/정치국방/성/성곽 |
수량/면적 | 10,813㎡ |
웹사이트 | 화산산성,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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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산성은 산 위에 쌓은 성을 말한다. 화산산성은 해발 828m 화산 정상부에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막기 위해 조선 후기에 쌓았다. 둘레는 약 9,300보, 높이가 10척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 숙종 35년(1709)에 병마절도사 윤숙이 군대를 주둔시키기 위해 동쪽과 서쪽, 그리고 남쪽과 북쪽 사방 문의 기초 공사를 시작하였다. 성벽을 쌓기 위해 돌로 된 재료를 모으고 수구문(水口門)*을 쌓던 중 흉년과 질병이 겹쳐 백성들에게 계속 부역을 시킬 수 없어 공사가 중지되었다. 그 후 계속 지금의 상태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고 한다.
현재 북문과 수구문은 성을 공사하던 옛 모습 그대로 흔적이 남아 있다. 북문은 화강석을 다듬어 만든 무지개 모양인데, 주위의 성벽은 높이 4m 내외, 폭 5m이다. 계곡을 관통하는 성벽 밑에 낸 수구문은 암반 위에 넓게 뜬 돌을 층층이 쌓아 만든 2층 구조이다. 1층은 넓은 2칸, 2층은 좁고 작은 3칸으로 만들어 배수량을 조절하였다.
조선 중기 이후 유행한 2층 수구의 형태, 조선 후기 성문과 성벽 등 성을 쌓던 기법과 공사의 순차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 수구문: 성안의 물이 성 밖으로 흘러나가는 수구에 만든 문.
영문
Hwasansanseong Fortress
영문 해설 내용
화산산성은 화산(해발 828m) 정상부를 둘러 돌로 쌓은 성이다.
외적의 침입을 막고 군대를 주둔시키기 위해 1709년 병마절도사 윤숙이 주도하여 성을 쌓기 시작했다. 그러나 흉년과 전염병 등으로 인해 공사가 중지되었고, 윤숙이 다른 지역으로 근무지를 옮겨가면서 공사가 더 진행되지 못하고 그대로 방치되었다.
현재 네 방향의 성문 기초, 배수를 위해 설치한 수구문 1기, 성벽 일부가 남아있으며, 이 중 북문과 수문은 1979년에 보수하였다.
북문은 화강암을 다듬어 만든 아치형 문이고, 양옆의 성벽은 높이 4m 내외, 폭 5m이다. 2층으로 만들어진 수구문은 아래층은 넓게, 위층은 좁게 만들어 배수량을 조절할 수 있도록 했으며, 이는 조선 후기에 유행한 형태이다.
조선 후기의 성을 쌓던 기법과 공사의 과정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참고자료
- 김상조의 문화유산답사기 <14> 군위 화산산성, 대경일보, 2020.1.27. 기사 http://www.dk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03577 -> 기본 정보 재확인 / 지금은 군사지역이라 내부 확인 어려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