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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ree-story Stone Pagoda at Hwangboksa Temple Site, Gyeong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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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탑은 부처의 유골을 모신 조형물이다. 실제 유골이 없는 경우가 많지만, 상징적으로 부처를 모신 신성한 곳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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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탑은 부처의 유골을 모신 상징적인 조형물이다. 모든 탑이 진신사리를 모신 것은 아니지만, 부처를 모신 신성한 곳으로 여겨 신앙의 대상이 된다.
 
 
이 삼층석탑은 692년 통일신라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워졌다. 이후 성덕왕이 706년에 사리와 불상 등을 다시 탑 안에 넣어 선왕들의 명복을 빌고, 왕실의 번영과 태평성대를 기원하였다.
 
 
 
탑은 2층의 기단, 3층의 몸돌과 지붕돌, 머리장식 일부로 구성되어 있다.
 
 
 
몸돌의 각 층에는 모서리 기둥과 2개의 안기둥을 새겼고, 지붕돌은 밑면에 5단의 받침을 두었다.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는데, 이는 이전 시기에 만들어진 탑과는 달라지는 양식이다.
 
  
1942년 탑을 해체, 수리할 때 2층 지붕돌 안에서 금동 사리함과 순금으로 만든 불상 2구, 유리구슬 등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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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삼층석탑은 692년 통일신라 신문왕(재위 681-691)의 명복을 빌기 위해 왕비인 신목태후와 아들인 효소왕(재위 692-702)이 세웠다고 한다. 이후 신문왕의 둘째 아들인 성덕왕(재위 702-737)이 706년에 사리와 불상 등을 탑 안에 모시며 선왕들의 명복을 빌고, 왕실의 번영과 태평성대를 기원하였다.  
  
특히 사리함의 뚜껑 안쪽에 탑을 건립하게 된 경위와 발견된 유물의 성격이 기록되어 있어 탑의 건립 연대와 조성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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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은 2층의 기단, 3층의 몸돌과 지붕돌, 머리장식 일부로 구성되어 있다. 1942년에 탑을 해체, 수리하였는데, 이때 2층 지붕돌 안에서 금동 사리함, 순금으로 만든 불상 2구, 유리구슬 등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특히 사리함의 뚜껑 안쪽에 탑을 건립하게 된 경위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탑의 건립 연대와 조성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었다.  
  
  

2020년 6월 13일 (토) 18:26 판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Three-story Stone Pagoda at Hwangboksa Temple Site, Gyeongju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영문명칭 Three-story Stone Pagoda at Hwangboksa Temple Site, Gyeongju
한자 慶州 皇福寺址 三層石塔
주소 경북 경주시 구황동 103
국가유산 종목 국보 제37호
지정(등록)일 1962년 12월 20일
분류 유적건조물/종교신앙/불교/탑
시대 통일신라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황복사는 낭산(狼山) 동북쪽에 있었던 신라시대의 절로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이곳에서 출가하였다. 탑은 전형적인 신라 삼층석탑으로 바닥돌의 각 면마다 2개씩 안기둥을 새기고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었다. 지붕돌 밑면에 5단의 받침을 두었고 꼭대기에는 머리장식 받침돌(露盤)만 남아있다.

기록에는 효소왕 원년(692)에 신문왕비인 신목태후와 효소왕이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탑을 세웠고, 효소왕의 뒤를 이은 성덕왕이 706년에 다시 부처님 사리와 순금불상 등을 봉안하여 두 왕의 명복과 왕실의 번영과 태평성대를 기원하였다고 한다. 1942년 탑을 해체, 수리할 때 2층 지붕돌 안에서 금동제 사리함과 순금으로 만든 불상 2구, 유리구슬 등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사리함의 뚜껑에는 탑을 건립하게 된 이유를 상세히 기록하였다.

건립시기가 명확하고 국보 제112호 감은사지 동ㆍ서삼층석탑, 국보 제38호 고선사지 삼층석탑과 비교하여 통일신라시대 초기 신라석탑의 변화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영문

Three-story Stone Pagoda at Hwangboksa Temple Site, Gyeongju

영문 해설 내용

불탑은 부처의 유골을 모신 상징적인 조형물이다. 모든 탑이 진신사리를 모신 것은 아니지만, 부처를 모신 신성한 곳으로 여겨 신앙의 대상이 된다.

이 삼층석탑은 692년 통일신라 신문왕(재위 681-691)의 명복을 빌기 위해 왕비인 신목태후와 아들인 효소왕(재위 692-702)이 세웠다고 한다. 이후 신문왕의 둘째 아들인 성덕왕(재위 702-737)이 706년에 사리와 불상 등을 탑 안에 모시며 선왕들의 명복을 빌고, 왕실의 번영과 태평성대를 기원하였다.

탑은 2층의 기단, 3층의 몸돌과 지붕돌, 머리장식 일부로 구성되어 있다. 1942년에 탑을 해체, 수리하였는데, 이때 2층 지붕돌 안에서 금동 사리함, 순금으로 만든 불상 2구, 유리구슬 등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특히 사리함의 뚜껑 안쪽에 탑을 건립하게 된 경위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탑의 건립 연대와 조성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