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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5월 13일 (수) 02:16 판


도산서원
도산서원,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도산서원
한자 道山書院
주소 대전광역시 서구 탄방동 220-1
지정(등록) 종목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호
지정(등록)일 1989년 3월 18일
분류 유적건조물/교육문화/교육기관/서원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도산서원,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도산서원(道山書院)은 조선 후기 학자며 문신이었던 만회 권득기(晩悔 權得己)와 탄옹 권시(炭翁 權諰) 부자(父子)를 제사하는 서원이다. 학문적으로 뛰어났던 두 사람은 박지계(朴知誡)와 송시열(宋時烈) 등 당대의 대표적인 학자들과 교류하였다. 또한 탄방 지역에 세거하면서 소론의 영수 윤증과 같은 문인을 양성하였다.

이 서원은 만회와 탄옹의 학문과 덕망을 기리기 위해 숙종 19년(1693)에 후학과 후손들이 세운 것으로, 숙종 37년(1711)에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다. 그러나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毁撤)되었다. 이후 1921년 후손들이 단(壇)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다 1968년과 1973년 두 차례에 걸쳐 현재의 서원으로 복원되었다.

도산서원이란 명칭은 현재의 위치가 ‘도산(道山)’이었기 때문에 붙인 것이다. 이곳에는 사당인 함덕사(涵德祠), 강학 공간인 명교당(明敎堂), 유생들이 묵었던 동재 시습재(時習齋)와 서재 지선재(止善齋), 제물과 제기를 보관하며 제사를 준비하는 전사청(典祀廳) 등이 있다.


  • 사액서원: 임금이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린 서원.
  • 훼철: 헐어서 치워 버림.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서원은 조선시대에 설립된 사설교육기관으로, 선현 제향과 교육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도산서원은 이 지역에 터를 잡고 집성촌을 이루었던 안동 권씨 가문의 권득기(1570-1622)와 권시(1604-1672) 부자를 모신 서원이다.

권득기는 1589년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갔으나, 광해군(재위 1608-1623)의 정치에 반대하여 사퇴한 후 학문에만 정진하다가 생을 마쳤다.

권시는 1649년 관직에 처음 나갔으며, 1660년 예송 논쟁으로 파직되어 낙향한 후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현재 서원 자리에 서당을 짓고 강학하며 예학에 정진하였다. 송시열과 같은 기호학파로서 예론에 밝았다.

이 서원은 1693년 세워졌고 1711년 사액을 받았으나,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려졌을 때 훼철(毁撤)되었다. 이후 후손들이 주도하여 1968년 사당 건물을 재건하였고, 1973년에는 다른 서원 건물들을 복원하였다.

서원은 정문, 동재, 서재, 강당, 내삼문, 사당, 전사청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산서원이란 이름은 서원 뒤에 있는 산의 명칭을 따서 지은 것이다.

  • 왼쪽에 아버지인 권득기의 위패를 모시고 오른쪽에 권시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왼쪽으로 들어가 오른쪽으로 나온다.
  • 본래 훼철 대상이 아니었다고 함 -> 서원이 훼철된 후 당시 충청도관찰사가 보낸 편지에서 도산서원은 훼철대상에서 빠졌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 도산서원은 옛날에 ‘숯뱅이’라고 불려지던 탄방동(炭坊洞) 도산(道山) 기슭에 세워진 서원이다. 숯뱅이는 안동권씨의 집성마을이다.
  • 매년 음력 3월과 9월에 지역 유림들이 모여 제향을 올린다.
  • 서원 인근에는(서원 앞 언덕에) 권시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참고 자료

=> 인물 정보 및 이 지역에 안동 권씨가 세거하게 된 배경, 서원의 상세한 구조 등 확인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