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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해설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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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석은 고려 말 한남리에 살던 정씨 부인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충신, 효자, 열녀에게 정려 현판 또는 정려비를 내렸으며, 정려를 받은 사람의 집 앞에 붉은 문을 세우거나 정려각을 세워 모셨다. 정씨 부인에게는 1481년 이전에 정려가 내려진 것으로 추정되며, 제주 열녀 가운데 가장 처음으로 정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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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고려가 원나라에 복속된 이후 제주에는 원나라에서 관리하는 대규모의 말 목장이 있었다. 정씨의 남편은 이 목장에서 일하던 원나라 사람이었다. 1374년 목장의 원나라 사람들이 고려 조정에 반란을 일으키자, 고려군이 이를 진압하였고, 이때 정씨의 남편이 죽자 정씨는 남편을 따라 자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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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 뒷면에는 1834년에 비석을 다시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2021년 10월 15일 (금) 12:02 판


고려 정씨 열녀비
대표명칭 고려 정씨 열녀비
지정(등록) 종목 제주특별자치도 향토유형유산



해설문

국문

고려 정씨 열녀비는 고려 후기 한남리에 살던 정씨(鄭氏)의 정절을 높이 사 세워진 비석으로, 정씨는 제주 열녀 가운데 가장 처음으로 정려되었다.

원 간섭기에 목호(牧胡) 석나리보개(석방리보개)의 아내인 열녀 정씨는 1374년(공민왕 23년) 목호의 난 때 최영 장군이 이끌던 고려군에 의해 남편이 죽자 그를 따라 자결하였는데, 이후 그 정절을 높이 사 1481년 이전에 정려가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비석 후면에 1834년(순조 34년) 한응호(韓應浩) 목사가 비석을 다시 세웠다고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볼 때, 그 이전부터 비석은 이미 세워져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이 비석은 고려 말 한남리에 살던 정씨 부인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충신, 효자, 열녀에게 정려 현판 또는 정려비를 내렸으며, 정려를 받은 사람의 집 앞에 붉은 문을 세우거나 정려각을 세워 모셨다. 정씨 부인에게는 1481년 이전에 정려가 내려진 것으로 추정되며, 제주 열녀 가운데 가장 처음으로 정려되었다.

고려 말 고려가 원나라에 복속된 이후 제주에는 원나라에서 관리하는 대규모의 말 목장이 있었다. 정씨의 남편은 이 목장에서 일하던 원나라 사람이었다. 1374년 목장의 원나라 사람들이 고려 조정에 반란을 일으키자, 고려군이 이를 진압하였고, 이때 정씨의 남편이 죽자 정씨는 남편을 따라 자결하였다.

비석 뒷면에는 1834년에 비석을 다시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