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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追遠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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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경북 안동시 안기2길 57-4 (안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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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경상북도 안동시 안기2길 57-4 (안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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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7호
 
|지정번호=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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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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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물은 고려 말 충신이자 효자로 이름난 김자수(金自粹, 1351-1413)의 제사를 모시는 재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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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 세워졌다고 전하나, 정확한 건립 시기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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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수는 고려가 망한 후 고향인 안동에서 은거하였으며, 고려가 망한 것을 안타까워하며 경기도 광주에 이르러 자결하여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키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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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은 온돌방을 건물 중앙에 두고 앞과 좌우를 마루로 두른 평면을 취하고 있으며, 마루를 감싸고 난간을 둘렀다. 온돌방은 전실과 신실(神室)로 구분되어 있으며, 문으로 공간을 구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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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월곡면 노산리에 있는 어머니 일직 손씨의 묘 아래에 있었는데, 안동댐 건설로 인해 1973년에 현재 자리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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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원재 앞에는 김자수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효자비가 자리한 비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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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씨의 묘제를 위한 재실이라는 정보도 있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확인이 안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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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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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원재, 디지털안동문화대전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0960 → 추원재는 고려 후기 충신이며 효자인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의 어머니인 일직손씨(一直孫氏)의 묘소 아래에 있는 재실로, 김자수의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김자수는 1351년(충정왕 3)에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금곡동에서 태어났다. 1374년(공민왕 23)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판서에 올랐으나 고려왕조가 망하자 절의를 지켜 은둔하였다. 조선 태종(太宗, 1367~1422)이 형조판서를 제수하여 부르자 아들에게 관을 준비하여 뒤따르게 하고는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추현에 이르러 자결하였다.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신련리에 신도비와 비각 그리고 묘소가 있다. / 추원재는 조선 말기에 건립되었다. 원래 경상북도 안동군 월곡면 노산동의 산기슭에 김자수의 정효(旌孝) 비각과 거리들 두고 있었으나, 1973년 안동댐 건설로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2021년 4월 18일 (일) 19:03 판


추원재
추원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추원재
한자 追遠齋
주소 경상북도 안동시 안기2길 57-4 (안기동)
국가유산 종목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7호
지정(등록)일 1973년 8월 31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추원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이 건물은 고려말 충신이며 효자인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의 어머니 묘소 아래에 있었다. 김자수는 충정왕(忠定王) 3년(1351)에 안동시 금곡동에서 태어났다. 공민왕(恭愍王) 23년(1374)에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판서에 올랐으나, 고려가 망하자 절의를 지켜 은둔하였다. 조선 태종(太宗)이 형조판서에 임명하자 어머니 손씨는 아들에게 관을 준비시키고 뒤따르게 하여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추현에 이르러 자결하였다. 광주군 오포면 신련리에 묘소가 있다.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집으로 신실(神室)과 전실을 중심으로 3면에 1칸 마루를 두었다. 원래 추원재는 월곡면 노산리에 있었는데, 1973년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이 곳으로 옮겼다.

수정 국문

초고

이 건물은 고려 말 충신이자 효자로 이름난 김자수(金自粹, 1351-1413)의 제사를 모시는 재사이다.

조선 후기에 세워졌다고 전하나, 정확한 건립 시기는 알 수 없다.

김자수는 고려가 망한 후 고향인 안동에서 은거하였으며, 고려가 망한 것을 안타까워하며 경기도 광주에 이르러 자결하여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키고자 하였다.

건물은 온돌방을 건물 중앙에 두고 앞과 좌우를 마루로 두른 평면을 취하고 있으며, 마루를 감싸고 난간을 둘렀다. 온돌방은 전실과 신실(神室)로 구분되어 있으며, 문으로 공간을 구분했다.

본래 월곡면 노산리에 있는 어머니 일직 손씨의 묘 아래에 있었는데, 안동댐 건설로 인해 1973년에 현재 자리로 옮겨졌다.

추원재 앞에는 김자수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효자비가 자리한 비각이 있다.

  • 손씨의 묘제를 위한 재실이라는 정보도 있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확인이 안됨.

1차 수정

문맥요소

Nodes

ID Class Label Description
추원재 Place 추원재
김자수 Actor 김자수(金自粹, 1351-1413)
김자수_묘 Place 김자수_묘
경기도_광주 Place 경기도_광주
안동댐_건설 Event 안동댐_건설
효자비 Object 효자비

Links

Source Target Relation
김자수 추원재 isRelatedTo
김자수_묘 김자수 isTombOf
김자수_묘 경기도_광주 currentLocation
추원재 안동댐_건설 isRelatedTo
추원재 효자비 isNear
효자비 김자수 isSteleOf

참고자료

  • 추원재, 디지털안동문화대전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0960 → 추원재는 고려 후기 충신이며 효자인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의 어머니인 일직손씨(一直孫氏)의 묘소 아래에 있는 재실로, 김자수의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김자수는 1351년(충정왕 3)에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금곡동에서 태어났다. 1374년(공민왕 23)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판서에 올랐으나 고려왕조가 망하자 절의를 지켜 은둔하였다. 조선 태종(太宗, 1367~1422)이 형조판서를 제수하여 부르자 아들에게 관을 준비하여 뒤따르게 하고는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추현에 이르러 자결하였다.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신련리에 신도비와 비각 그리고 묘소가 있다. / 추원재는 조선 말기에 건립되었다. 원래 경상북도 안동군 월곡면 노산동의 산기슭에 김자수의 정효(旌孝) 비각과 거리들 두고 있었으나, 1973년 안동댐 건설로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