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행중

"황룡사 구층목탑 심초석(경주 황룡사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Heritage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새 문서: {{진행중}} {{문화유산정보 |사진=경주황룡사지(황룡사구층목탑심초석).jpg |사진출처=[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1333700...)
 
1번째 줄: 1번째 줄:
 
{{진행중}}
 
{{진행중}}
{{문화유산정보
+
{{개별안내판
 
|사진=경주황룡사지(황룡사구층목탑심초석).jpg
 
|사진=경주황룡사지(황룡사구층목탑심초석).jpg
 
|사진출처=[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1333700060000 경주 황룡사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사진출처=[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1333700060000 경주 황룡사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경주 황룡사지(황룡사 구층목탑 심초석)
 
|대표명칭=경주 황룡사지(황룡사 구층목탑 심초석)
 +
|한자=
 
|영문명칭=
 
|영문명칭=
|한자=
+
|종합안내판=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320-2
 
|소장처=
 
|지정번호=
 
|지정일=
 
|분류=
 
|소유자=
 
|관리자=
 
|시대=신라
 
|제작시기=
 
|수량/면적=
 
|웹사이트=
 
 
|위도=35.838793
 
|위도=35.838793
 
|경도=129.232136
 
|경도=129.232136
38번째 줄: 28번째 줄:
  
 
===영문 해설 내용===
 
===영문 해설 내용===
심초석은 목탑의 중심 기둥을 받쳐 무게중심을 유지하는 역할을 하는 석재이다. 안에 사리장치를 넣기 위한 네모난 구멍이 있고, 구멍 바깥에 홈을 내서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하였다.
+
목탑의 한가운데에서 중심 기둥을 받치던 석재이다. 무게는 약 30톤이다. 심초석 안에는 사리장치를 넣었던 네모난 구멍이 있고, 구멍 바깥에 두 줄의 홈을 파서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하였다.  
 
 
황룡사 심초석은 1964년 목탑터를 재정비하기 위해 민가를 헐어낸 직후 도굴범들에 의해 덮개돌이 파손되고 내부의 사리장치를 도난당했다가, 2년 뒤 되찾게 되었다. 회수된 일부 유물 중에 872년 황룡사 구층 목탑을 수리하면서 넣은 사리함 찰주본기(보물 제1870호)가 포함되어 있었다.
 
 
 
찰주본기에는 구층 목탑을 처음 조성한 이유와 탑을 수리하게 된 배경 및 과정, 탑 속에 안치된 사리장엄구의 내용 등이 나열되어 있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1976년부터 실시된 발굴조사 과정에서 크레인을 동원해 심초석을 들어올렸다. 그 아래에서 땅의 기운을 누르는 의미에서 묻어 둔 것으로 보이는 청동제 팔찌와 그릇 등이 출토되었다.  
+
1964년 황룡사지에 도굴범들이 침임하여, 심초석의 덮개돌을 파손하고 내부의 사리장치를 비롯한 유물들을 훔쳐갔다. 그러나 이 도굴범들이 2년 뒤 불국사 석가탑의 사리장치를 훔치려다 잡혔고, 황룡사 목탑의 사리장치를 되찾을 수 있었다. 회수된 유물 중에는 872년 목탑을 수리하면서 넣은 찰주본기(보물 제1870호)가 포함되어 있었다. 금동 사리함의 내외면에 새겨진 이 기록에 의하면 삼국을 통일하여 임금과 신하가 안락하게 된 것은 이 탑을 세운 덕이라 하고, 탑을 수리하게 된 배경 및 과정, 탑 속에 안치된 사리장엄구의 내용 등을 나열하였따.
  
 +
1976년부터 실시된 발굴조사 과정에서 크레인을 동원해 심초석을 들어올렸다. 그 아래에서는 땅속의 나쁜 기운을 누르는 의미에서 묻어 둔 것으로 보이는 청동 팔찌와 청동 그릇 등이 출토되었다.
  
==참고 자료==
+
=='''참고자료'''==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754149&cid=49232&categoryId=49232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754149&cid=49232&categoryId=49232
 
*https://www.culture.go.kr/data/data/view.do?url=http%3A%2F%2Fwww.k-heritage.tv%2Fbrd%2Fboard%2F229%2FL%2FCATEGORY%2F2339%2Fmenu%2F375%3FbbIdx%3D10936%26brdType%3DR&contextName=http%3A%2F%2F175.125.91.94%2Fopenapi%2Frdf%2FKheritagetv.rdf&category=B08
 
*https://www.culture.go.kr/data/data/view.do?url=http%3A%2F%2Fwww.k-heritage.tv%2Fbrd%2Fboard%2F229%2FL%2FCATEGORY%2F2339%2Fmenu%2F375%3FbbIdx%3D10936%26brdType%3DR&contextName=http%3A%2F%2F175.125.91.94%2Fopenapi%2Frdf%2FKheritagetv.rdf&category=B08

2020년 6월 20일 (토) 02:02 판


경주 황룡사지(황룡사 구층목탑 심초석)
경주 황룡사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Goto.png 종합안내판: [[]]



해설문

국문

심초석은 목탑의 한가운데에 놓아 기둥을 받치던 석재이다. 긴 타원형으로 무게가 30여 톤으로 알려져 있다. 심초석 안에 사리장치를 넣었던 네모난 구멍이 있고, 그 바깥으로 두 줄의 홈을 파서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하였다.

1964년 12월 도굴범들이 막 민가가 철거된 절터에 침입하여 심초석의 덮개돌을 부수고 사리장치를 훔쳐가는 사건이 있었다. 2년 뒤 불국사 석가탑의 사리장치를 훔치려다 덜미를 잡힌 도굴범들의 여죄를 추궁하는 과정에서 사라진 황룡사 목탑의 사리장치를 되찾게 되었다. 회수된 유물 가운데 황룡사구층목탑 사리함 찰주본기*(刹柱本紀, 보물 제1870호)가 포함되어 있었다.

경문왕 12년(872)에 구층목탑을 수리하면서 써넣은 찰주본기에 의하면 삼국을 통일하여 임금과 신하가 안락하게 된 것은 이 탑을 세운 것에 힘입은 덕이라 하고, 경문왕대에 탑을 새로 세우게 된 배경과 과정, 그리고 탑 속에 안치된 사리장엄구의 내용을 나열하였다.

심초석 아래에서는 땅의 기운을 누르는 의미(地鎭具)*에서 묻어 둔 것으로 보이는 청동제 팔찌, 청동제 그릇 등이 출토되었다. ---

  •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 금동찰주본기 (慶州 皇龍寺 九層木塔 金銅刹柱本記) : 보물 제1870호. 경문왕 12년 황룡사의 구층목탑을 중수하면서 기록한 실물자료. 목탑 건립과 관련하여『삼국사기』나 『삼국유사』등 후대의 기록들과 비교 검토가 가능해서 신라시대의 시대상과 불교사 등 담고 있는 역사적 유물로서의 가치가 크다.
  • 지진구(地鎭具) : 건축물의 기단부를 조성할 때 땅 속에 있는 나쁜 기운을 진압하려는 목적으로 넣어지는 진귀한 물건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목탑의 한가운데에서 중심 기둥을 받치던 석재이다. 무게는 약 30톤이다. 심초석 안에는 사리장치를 넣었던 네모난 구멍이 있고, 구멍 바깥에 두 줄의 홈을 파서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하였다.

1964년 황룡사지에 도굴범들이 침임하여, 심초석의 덮개돌을 파손하고 내부의 사리장치를 비롯한 유물들을 훔쳐갔다. 그러나 이 도굴범들이 2년 뒤 불국사 석가탑의 사리장치를 훔치려다 잡혔고, 황룡사 목탑의 사리장치를 되찾을 수 있었다. 회수된 유물 중에는 872년 목탑을 수리하면서 넣은 찰주본기(보물 제1870호)가 포함되어 있었다. 금동 사리함의 내외면에 새겨진 이 기록에 의하면 삼국을 통일하여 임금과 신하가 안락하게 된 것은 이 탑을 세운 덕이라 하고, 탑을 수리하게 된 배경 및 과정, 탑 속에 안치된 사리장엄구의 내용 등을 나열하였따.

1976년부터 실시된 발굴조사 과정에서 크레인을 동원해 심초석을 들어올렸다. 그 아래에서는 땅속의 나쁜 기운을 누르는 의미에서 묻어 둔 것으로 보이는 청동 팔찌와 청동 그릇 등이 출토되었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