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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정여창 묘역"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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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333802680000 함양 정여창 묘역],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사진출처=[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333802680000 함양 정여창 묘역],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함양 정여창묘역
 
|대표명칭=함양 정여창묘역
|영문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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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Tomb of Jeong Yeo-chang, Hamyang
|한자=一蠹 鄭汝昌 墓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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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咸陽 鄭汝昌 墓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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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산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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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경상남도 기념물 제268호
 
|지정번호=경상남도 기념물 제2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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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량/면적=8,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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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333802680000 함양 정여창 묘역],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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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해설문'''==
===기존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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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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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두 정여창(一蠹 鄭汝昌, 1450~1504)의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욱(伯勗)이다. 성리학의 대가로 경서와 사기에 통달하였는데 주로 지식과 행동이 서로 일치하는 지행일치(知行一致)를 위한 독서를 하였다. 무오사화로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된 지 5년 만에 그곳에서 타계하였으며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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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묘역은 승안사지(昇安寺址) 안의 하동 정씨 선영에 있다. 정여창의 부인 완산 이씨의 묘와 함께 있으며 묘역의 면적은 약 8,701㎡이다. 조선 전기 사대부의 무덤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묘역 안의 석물들도 높은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다.
  
===수정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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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입구에는 순조 33년(1833) 정여창의 11대 손인 동로가 세운 하동 정씨의 재실인 여재각(如在閣)있으며, 묘소 주변에는 승안사지 삼층석탑(보물 제294호), 승안사지 석조여래좌상(유형 문화재 제33호) 등의 문화재가 있다.  
====초고====
 
묘역은 조선 전기의 문신인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정여창은 1483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1486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문하에서 학문을 하였고 성리학을 깊이 탐구하였다. 1498년 신진 사림들이 무오사화(戊午士禍)로 화을 입게 되었을 때에 종성(鍾城)으로 유배되었다. 1504년에 사망한 이후 다시 한번 사림들이 갑자사화(甲子士禍)로 화를 입게 되었는데,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의 복위를 반대했었다는 이유로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다. 이후 1517년에 우의정으로 증직되었고, 1610년에는 문묘에 모셔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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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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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mb of Jeong Yeo-chang, Hamyang'''
  
묘역 내에는 정여창의 묘와 그의 부인인 정경부인 완산이씨의 묘가 일렬로 자리 잡고 있다. 묘 앞에 있는 신도비는 그에게 사숙했던 정온(鄭蘊, 1569~1641)이 지은 것으로 1689년에 건립되었다. 신도비와 함께 문인석, 망주석, 석양 등의 석물이 봉분 앞에 세워져 있다. 또한 근래에 세운 묘비 1기도 있다.
 
  
이 묘역은 묘의 형태와 묘역 내의 각종 석물들을 통해 조선 전기 사대부의 무덤 양식을 잘 알 수 있는 중요한 문화재이다.
 
  
====1차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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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해설 내용===
조선 전기의 문신인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의 묘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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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문신인 정여창(1450-1504)의 무덤이다.
  
정여창은 1486년 과거에 급제한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제자로 성리학을 깊이 탐구하였으며, 1498년 무오사화로 신진 사림들이 화를 입게 되었을 때에 함경북도 종성으로 유배되었다. 사망 직후인 1504년에 다시 한번 사림들이 갑자사화로 화를 입게 되었는데, 연산군(1494~1506 재위)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의 복위를 반대했었다는 이유로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다. 이후 1517년에 우의정으로 증직되었고, 1610년에는 문묘에 모셔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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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창은 1486년 과거에 급제한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성리학의 대가였으며 지행일치(知行一致)를 추구하였다. 1498년 사화로 사림들이 화를 입었을 때 함경북도 종성으로 유배되었고,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망 직후인 1504년에 다시 한번 사화가 일어났을 때 부관참시를 당하였다. 이후 신원되어 1517년에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1610년에는 문묘에 모셔지게 되었다.
 
 
묘역 내에는 정여창의 묘와 그의 부인인 정경부인 완산이씨의 묘가 앞뒤로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봉분 앞에 있는 신도비는 정여창의 제자인 정온(鄭蘊, 1569~1641)이 비문을 지었고 1689년에 건립되었다. 이밖에도 문인석, 망주석, 석양 등의 석물이 봉분 앞에 세워져 있으며, 거북 모양의 받침돌 위에 세워진 묘비는 근래에 새로 세운 것이다. 묘의 형태와 각종 석물들을 통해 조선 전기 사대부의 무덤 양식을 잘 알 수 있다.
 
 
 
====자문의견====
 
#분야별 자문위원 1
 
#*신진 사림들이 화를 입게 되었을 때에 > 신진 사림들이 화를 입을 때
 
#**수정이유: 문장 명료화.
 
#*사망 직후인 1504년에 다시 한번 사림들이 갑자사화로 화를 입게 되었는데, 연산군(1494~1506 재위)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의 복위를 반대했었다는 이유로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다. → 사망 직후인 1504년에 갑자사화가 일어났을 때 다시 부관참시당했다. (수정 문안 예시)
 
#**수정이유: 정여창이 폐비 윤씨의 복위를 반대했었다는 이유로 부관참시당했다는 사실은 원고의 근거 자료에서 확인되지 않으며, 다른 자료에서도 바로 확인되지 않음. 정확한 사실을 확인할 필요 있음.
 
#*정여창의 제자인 정온(鄭蘊, 1569~1641)이 → 후대 인물인 정온(鄭蘊, 1569~1641)이
 
#**수정이유: 정여창과 정온은 시대가 달라 직접 사제관계가 될 수 없음.
 
 
 
====2차 수정====
 
조선 전기의 문신인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의 묘소이다.
 
 
 
정여창은 1486년 과거에 급제한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제자로 성리학을 깊이 탐구하였으며, 1498년 무오사화로 신진 사림들이 화를 입었을 때 함경북도 종성으로 유배되었다. 사망 직후인 1504년에 다시 한번 사림들이 갑자사화로 화를 입었는데, 연산군(1494~1506 재위)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의 복위를 반대했었다는 이유로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다. 이후 1517년에 우의정으로 증직되었고, 1610년에는 문묘에 모셔지게 되었다.
 
 
 
묘역 내에는 정여창의 묘와 그의 부인인 정경부인 완산이씨의 묘가 앞뒤로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봉분 앞에 있는 신도비는 정온(鄭蘊, 1569~1641)이 비문을 지었고 1689년에 건립되었다. 이밖에도 문인석, 망주석, 석양 등의 석물이 봉분 앞에 세워져 있으며, 거북 모양의 받침돌 위에 세워진 묘비는 근래에 새로 세운 것이다. 묘의 형태와 각종 석물들을 통해 조선 전기 사대부의 무덤 양식을 잘 알 수 있다.
 
 
 
=='''문맥요소'''==
 
===Nodes===
 
 
 
===Lin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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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창의 묘소는 하동정씨 문중 묘역 내에 자리하고 있으며, 뒤쪽에는 부인인 완산이씨의 묘가 있다. 문인석, 망주석, 석양 등의 석물이 봉분 앞에 세워져 있으며, 거북 모양의 받침돌 위에 세워진 묘비는 근래에 새로 세운 것이다. 조선 전기 사대부의 무덤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묘역 안의 석물들도 높은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다.
  
 +
묘역 입구에는 1833년에 세워진 하동정씨 문중의 재실인 여재각이 있다.
  
 
=='''참고자료'''==
 
=='''참고자료'''==
* 함양 정여창묘역(一蠹 鄭汝昌 墓域),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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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양 정여창묘역(一蠹 鄭汝昌 墓域),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1_1&ccbaCpno=2333802680000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1_1&ccbaCpno=2333802680000
 
::→ 표제어의 한글과 한자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 정여창(鄭汝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A0%95%EC%97%AC%EC%B0%BD%EB%AC%98%EC%97%AD&ridx=0&tot=170
 
* 정여창(鄭汝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A0%95%EC%97%AC%EC%B0%BD%EB%AC%98%EC%97%AD&ridx=0&tot=170
 
* 함양 정여창 묘역,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http://www.grandculture.net/ko/Contents/Index
 
* 함양 정여창 묘역,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http://www.grandculture.net/ko/Contents/Ind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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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2020 영문집필]]

2020년 7월 18일 (토) 17:15 판


함양 정여창묘역
Tomb of Jeong Yeo-chang, Hamyang
함양 정여창 묘역,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함양 정여창묘역
영문명칭 Tomb of Jeong Yeo-chang, Hamyang
한자 咸陽 鄭汝昌 墓域)
주소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산10-9
국가유산 종목 경상남도 기념물 제268호
지정(등록)일 2008년 2월 5일
분류 유적건조물/무덤/무덤/봉토묘
수량/면적 8,701
웹사이트 함양 정여창 묘역,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일두 정여창(一蠹 鄭汝昌, 1450~1504)의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욱(伯勗)이다. 성리학의 대가로 경서와 사기에 통달하였는데 주로 지식과 행동이 서로 일치하는 지행일치(知行一致)를 위한 독서를 하였다. 무오사화로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된 지 5년 만에 그곳에서 타계하였으며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 되었다.

이 묘역은 승안사지(昇安寺址) 안의 하동 정씨 선영에 있다. 정여창의 부인 완산 이씨의 묘와 함께 있으며 묘역의 면적은 약 8,701㎡이다. 조선 전기 사대부의 무덤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묘역 안의 석물들도 높은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다.

묘소 입구에는 순조 33년(1833) 정여창의 11대 손인 동로가 세운 하동 정씨의 재실인 여재각(如在閣)이 있으며, 묘소 주변에는 승안사지 삼층석탑(보물 제294호), 승안사지 석조여래좌상(유형 문화재 제33호) 등의 문화재가 있다.

영문

Tomb of Jeong Yeo-chang, Hamyang


영문 해설 내용

조선시대의 문신인 정여창(1450-1504)의 무덤이다.

정여창은 1486년 과거에 급제한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성리학의 대가였으며 지행일치(知行一致)를 추구하였다. 1498년 사화로 사림들이 화를 입었을 때 함경북도 종성으로 유배되었고,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망 직후인 1504년에 다시 한번 사화가 일어났을 때 부관참시를 당하였다. 이후 신원되어 1517년에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1610년에는 문묘에 모셔지게 되었다.

정여창의 묘소는 하동정씨 문중 묘역 내에 자리하고 있으며, 뒤쪽에는 부인인 완산이씨의 묘가 있다. 문인석, 망주석, 석양 등의 석물이 봉분 앞에 세워져 있으며, 거북 모양의 받침돌 위에 세워진 묘비는 근래에 새로 세운 것이다. 조선 전기 사대부의 무덤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묘역 안의 석물들도 높은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다.

묘역 입구에는 1833년에 세워진 하동정씨 문중의 재실인 여재각이 있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