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행중

"순창 성황대신 사적 현판"의 두 판 사이의 차이

Heritage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새 문서: {{진행중}} {{문화유산정보 |사진=순창성황대신사적현판.jpg |사진출처=[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1483502380000 순창 성황...)
 
(1차 수정)
36번째 줄: 36번째 줄:
  
 
====1차 수정====
 
====1차 수정====
 +
1281년부터 1823년까지 순창 지역에서 성황대신에게 올리던 제사의 변화 과정을 기록한 현판이다.
  
 +
현판에 새겨진 기록에 따르면 순창에서는 남신과 여신을 모셨는데, 남신은 고려시대의 문신인 이 지역 출신 설공검(薛公儉, 1224~1302)이고, 여신은 이 지역의 대모산성(大母山城)을 쌓았다고 하는 전설적인 대모(大母)이다. 고려시대에 두 차례에 걸쳐 두 성황신에게 작위를 내렸고 이후 성황당을 여러 차례 고쳐 세웠다.
 +
 +
이 현판은 1743년에 만들었으며, 이후 1754년과 1823년에 성황당을 고쳐 지으면서 내용을 추가로 기록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성황당이 철거되면서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다가, 1992년에 다시 발견되었다. 가로 180㎝, 세로 54㎝ 길이의 소나무판 2개를 위아래로 이어붙여 만들었고, 총 73행, 1,600여 자가 세로로 쓰여있다.
 +
 +
성황신앙의 변천과 이를 둘러싼 순창 지역사회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민속자료이다. 또한 한문과 이두가 섞여 이두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문맥요소'''==
 
=='''문맥요소'''==

2020년 4월 29일 (수) 20:16 판


순창 성황대신 사적 현판
Hanging Board with a Record of Serving the Tutelary Deity, Sunchang
순창 성황대신 사적 현판,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순창 성황대신 사적 현판
영문명칭 Hanging Board with a Record of Serving the Tutelary Deity, Sunchang
한자 淳昌 城隍大神 事跡 懸板
국가유산 종목 국가민속문화재 제238호
지정(등록)일 2000년 1월 13일
분류 기록유산/서각류/목판각류/현판류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점
웹사이트 순창 성황대신 사적 현판,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소나무판으로 만든 이 현판은 1743년 조정옥이 원래 있던 현판을 보고 다시 쓴 것이다. 주요 내용은 고려 충렬왕 때의 인물 설공검(薛公儉, 1224∼1302)을 성황대신으로 모시고, 매년 단오(端午)에 제사를 올렸다는 것과, 13세기부터 19세기까지 약 600년 동안 순창 성황당과 성황제의 변화 과정에 대한 것이다. 크기는 가로 180cm, 세로 54cm이며, 한문과 이두가 섞여 있는 글씨는 71행이다. 이 현판은 성황신앙에 관한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순창 성황당은 1940년대까지 순화리 옥천동에 있었다고 전해오고 있으나,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수정 국문

초고

이 현판은 순창 지역에서 성황대신에게 제사를 지낸 사적을 기록한 것이다.

처음 제작된 것은 1563년으로 이 지역의 관리들에 의해 만들어졌으나, 이것이 낡게 되자 1633년에 다시 만들었다. 1743년에는 사우(祠宇)를 헐고 대폭 증축하면서 이 현판을 2차로 다시 만들게 되는데 이것이 현재 남아 있는 현판이다.

현판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 성황당에는 남신과 여신이 모셔져 있는데 남신은 고려시대의 문신인 이 지역 출신 설공검(薛公儉, 1224~1302)이고, 여신은 이 지역의 대모산성(大母山城)을 쌓았다고 하는 전설적인 대모(大母)이다. 그 뒤에는 고려시대에 성황신 내외에게 2차례에 걸쳐 작위를 내린 공문이 수록되어 있다. 그 다음으로는 1743년 당시까지 성황당과 성황제의 변화를 설명하면서 관련 인사들의 명단을 제시하였다. 이후 1754년과 1823년에 사우를 중건하였는데 이는 현판의 하단에 추가하여 다른 필체로 기록하였다.

이 현판은 성황신앙의 역사적 변천과정을 볼 수 있는 민속자료로서의 가치가 높다. 또한 성황당의 중건과 현판 제작에 관계한 인물들의 명단은 지방 제사와 지방 세력의 관계를 구명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아울러 이두로 작성된 고려시대의 공문을 그대로 옮겨 적었기 때문에, 고려시대의 공문서 양식이나 이두 이해에도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1차 수정

1281년부터 1823년까지 순창 지역에서 성황대신에게 올리던 제사의 변화 과정을 기록한 현판이다.

현판에 새겨진 기록에 따르면 순창에서는 남신과 여신을 모셨는데, 남신은 고려시대의 문신인 이 지역 출신 설공검(薛公儉, 1224~1302)이고, 여신은 이 지역의 대모산성(大母山城)을 쌓았다고 하는 전설적인 대모(大母)이다. 고려시대에 두 차례에 걸쳐 두 성황신에게 작위를 내렸고 이후 성황당을 여러 차례 고쳐 세웠다.

이 현판은 1743년에 만들었으며, 이후 1754년과 1823년에 성황당을 고쳐 지으면서 내용을 추가로 기록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성황당이 철거되면서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다가, 1992년에 다시 발견되었다. 가로 180㎝, 세로 54㎝ 길이의 소나무판 2개를 위아래로 이어붙여 만들었고, 총 73행, 1,600여 자가 세로로 쓰여있다.

성황신앙의 변천과 이를 둘러싼 순창 지역사회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민속자료이다. 또한 한문과 이두가 섞여 이두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문맥요소

Nodes

Links

참고자료

  • 김기덕, 「고려시대 성황신에 대한 봉작과 순창의 「성황대신사적」 현판의 분석」, 󰡔역사민속학󰡕 7, 한국역사민속학회, 1998.
→김기덕의 연구를 통해 전체 현판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 정승모, 「조선 중기 전라도 순창군 성황제의의 성격」, 󰡔역사민속학󰡕 7, 한국역사민속학회, 1998.
→정승모의 연구에서는 성황당의 남신과 여신의 실체에 대해 파악할 수 있다. 본래부터 이 성황당의 남신이 설공검, 여신이 대모인 것은 아니었다. 이 성황당에 성황신 부부의 신상이 세워진 것은 1743년이다. 고려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성황제사는 국가의 제사로 시행되었는데, 조선시대에는 淫祀로 규정되었다. 당시 이 지역에 부임한 양응정(梁應鼎)이라는 군수는 신격이 모호하고 무속적 성격이 강한 순창의 성황신과 제의를 ‘음사’로 규정하고 규모를 축소하거나 매달 행해지는 제사를 폐지하였다. 그런데 다른 지역의 성황제의와 차이가 있는 것이 이 지역의 행사주체인 향리들은 군수의 조처에 대해 성황신의 성격을 음사에서 벗어날 수 있게 변형시킨 것이다. 그럼으로써 성황제의가 유지될 수 있도록 대응한 것인데, 우선 애매했던 신격을 이 지역 순창설씨 집안에서 찾은 것이다. 고려 중앙 정부에서 높은 관직을 지냈고 무엇보다도 성리학적 소양과 실천의 행적을 가지고 있었으며 향리집단을 포함한 대표적 성씨의 하나인 설씨 문중의 중시조격인 설공검을 성황신화 하였다. 이에 반해 여신의 신격화는 현실성이 없이 막연한 감이 있는데, 대모산성의 대모를 끌어들인 것은 여신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