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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려는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기리어 그 동네에 세우던 문이나 누각을 말한다. 남양 홍씨 열녀 정려는 영조 대에 승지를 지낸 최태형(崔台衡)의 부인 남양 홍씨의 열행*을 기리고자 세웠다. 남편 최태형의 본관은 삭녕(朔寧)으로 영조 19년(1743) 문과에 급제하여 개령현감이 된 이후 언론을 담당하는 사간원의 헌납·정원·사간·집의 등을 지냈으며, 영조 말년인 1767년부터 1775년까지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의 동부승지·우승지를 지내며 왕을 보필하였다.
 
정려는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기리어 그 동네에 세우던 문이나 누각을 말한다. 남양 홍씨 열녀 정려는 영조 대에 승지를 지낸 최태형(崔台衡)의 부인 남양 홍씨의 열행*을 기리고자 세웠다. 남편 최태형의 본관은 삭녕(朔寧)으로 영조 19년(1743) 문과에 급제하여 개령현감이 된 이후 언론을 담당하는 사간원의 헌납·정원·사간·집의 등을 지냈으며, 영조 말년인 1767년부터 1775년까지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의 동부승지·우승지를 지내며 왕을 보필하였다.
  
남양 홍씨는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홍섬(洪暹)의 5대손인 선릉 참봉 홍신상(洪藎相)의 딸이다. 남양 홍씨는 남편이 말년에 병을 얻어 위독해지자 밤낮없이 간병하며,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남편에게 그 피를 마시도록 하여 며칠을 더 연명하게 하였다. 결국 1787년 8월 29일 경에 남편이 사망하자 매우 슬퍼하며 8일 동안 물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으니, 자녀들은 자결하지 못하도록 간곡히 말리며 곁에서 보호하고 지켰다. 그러나 두 달 후인 10월 13일 밤 남양 홍씨는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시신 옆에는 소금물 찌꺼기가 남은 빈 사발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져 정조 10년(1786) 11월 11일에 남양 홍씨를 열녀로 기리고자 정려를 세우는 것이 결정되었으며, 『일성록』과 『효행등제등록』에 그 사실을 기록하였다. 이듬해인 정조 11년(1787) 10월에 공식적으로 열녀 명정을 받았으며, 정려는 두 부부의 묘소 아래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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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 홍씨는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홍섬(洪暹)의 5대손인 선릉 참봉 홍신상(洪藎相)의 딸이다. 남양 홍씨는 남편이 말년에 병을 얻어 위독해지자 밤낮없이 간병하며,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남편에게 그 피를 마시도록 하여 며칠을 더 연명하게 하였다. 결국 '''1787년 8월 29일 경'''에 남편이 사망하자 매우 슬퍼하며 8일 동안 물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으니, 자녀들은 자결하지 못하도록 간곡히 말리며 곁에서 보호하고 지켰다. 그러나 '''두 달 후인 10월 13일 밤''' 남양 홍씨는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시신 옆에는 소금물 찌꺼기가 남은 빈 사발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져 정조 10년(1786) 11월 11일에 남양 홍씨를 열녀로 기리고자 정려를 세우는 것이 결정되었으며, 『일성록』과 『효행등제등록』에 그 사실을 기록하였다. 이듬해인 정조 11년(1787) 10월에 공식적으로 열녀 명정을 받았으며, 정려는 두 부부의 묘소 아래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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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행(烈行): 여자가 정절을 훌륭하게 지키는 행위
 
* 열행(烈行): 여자가 정절을 훌륭하게 지키는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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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nt color="tomato">최태형의 사망연도는 1783년임. 정려가 결정된 것이 1786년이므로 사망 연도가 1787년일 수 없음. </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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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태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7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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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나는 문화유산 방문교육 10 - 화성의 효 이야기』, 화성문화원, 2013, 54-55쪽. https://memory.library.kr/files/original/bbe6ec876a3b063156108f442d407bac.pdf
  
 
===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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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해설 내용===
 
===영문 해설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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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려각은 조선시대의 문신 최태형(1718-1783)의 부인 남양 홍씨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부부의 묘소 근처에 세워졌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충신, 효자, 열녀에게 정려 현판 또는 정려비를 내렸으며, 정려를 받은 사람의 집 앞에 붉은 문을 세우거나 정려각을 세워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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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 홍씨는 남편이 말년에 병을 얻어 위독해지자 밤낮없이 간병하며,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남편에게 그 피를 마시도록 하여 며칠을 더 연명하게 하였다. 결국 1783년 남편이 사망하자 매우 슬퍼하며 8일 동안 물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으니, 자녀들은 홍씨가 자결하지 못하도록 간곡히 말리며 곁에서 보호하고 지켰다. 그러나 두달 후 홍씨는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시신 옆에는 소금물 찌꺼기가 남은 빈 사발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져 1786년에 남양 홍씨를 열녀로 기리고자 정려를 내리기로 결정되었고, 홍씨는 이듬해 공식적으로 열녀 명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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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형은 1743년 과거에 급제한 후 현감과 사간원의 여러 관직을 지냈다. 1767년부터 1775년까지는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의 관리로서 왕을 보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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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28일 (수) 19:36 기준 최신판


남양 홍씨 열녀 정려문
대표명칭 남양 홍씨 열녀 정려문
한자 南陽 洪氏 烈女 旌閭門
지정(등록) 종목 화성시 향토문화유산



해설문

국문

정려는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기리어 그 동네에 세우던 문이나 누각을 말한다. 남양 홍씨 열녀 정려는 영조 대에 승지를 지낸 최태형(崔台衡)의 부인 남양 홍씨의 열행*을 기리고자 세웠다. 남편 최태형의 본관은 삭녕(朔寧)으로 영조 19년(1743) 문과에 급제하여 개령현감이 된 이후 언론을 담당하는 사간원의 헌납·정원·사간·집의 등을 지냈으며, 영조 말년인 1767년부터 1775년까지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의 동부승지·우승지를 지내며 왕을 보필하였다.

남양 홍씨는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홍섬(洪暹)의 5대손인 선릉 참봉 홍신상(洪藎相)의 딸이다. 남양 홍씨는 남편이 말년에 병을 얻어 위독해지자 밤낮없이 간병하며,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남편에게 그 피를 마시도록 하여 며칠을 더 연명하게 하였다. 결국 1787년 8월 29일 경에 남편이 사망하자 매우 슬퍼하며 8일 동안 물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으니, 자녀들은 자결하지 못하도록 간곡히 말리며 곁에서 보호하고 지켰다. 그러나 두 달 후인 10월 13일 밤 남양 홍씨는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시신 옆에는 소금물 찌꺼기가 남은 빈 사발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져 정조 10년(1786) 11월 11일에 남양 홍씨를 열녀로 기리고자 정려를 세우는 것이 결정되었으며, 『일성록』과 『효행등제등록』에 그 사실을 기록하였다. 이듬해인 정조 11년(1787) 10월에 공식적으로 열녀 명정을 받았으며, 정려는 두 부부의 묘소 아래 세웠다.


  • 열행(烈行): 여자가 정절을 훌륭하게 지키는 행위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이 정려각은 조선시대의 문신 최태형(1718-1783)의 부인 남양 홍씨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부부의 묘소 근처에 세워졌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충신, 효자, 열녀에게 정려 현판 또는 정려비를 내렸으며, 정려를 받은 사람의 집 앞에 붉은 문을 세우거나 정려각을 세워 모셨다.

남양 홍씨는 남편이 말년에 병을 얻어 위독해지자 밤낮없이 간병하며,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남편에게 그 피를 마시도록 하여 며칠을 더 연명하게 하였다. 결국 1783년 남편이 사망하자 매우 슬퍼하며 8일 동안 물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으니, 자녀들은 홍씨가 자결하지 못하도록 간곡히 말리며 곁에서 보호하고 지켰다. 그러나 두달 후 홍씨는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시신 옆에는 소금물 찌꺼기가 남은 빈 사발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져 1786년에 남양 홍씨를 열녀로 기리고자 정려를 내리기로 결정되었고, 홍씨는 이듬해 공식적으로 열녀 명정을 받았다.

최태형은 1743년 과거에 급제한 후 현감과 사간원의 여러 관직을 지냈다. 1767년부터 1775년까지는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의 관리로서 왕을 보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