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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3413400690000 화산영당],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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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Hwasanyeongdang Shr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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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만가리길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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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해설문'''==
===기존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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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정규한(鄭奎漢, 1750~1824)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제자와 유생들이 순조 32년(1832)에 세운 사당이다.
+
화산영당은 조선 시대의 학자 화산 정규한(華山 鄭奎漢, 1750~1824)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1832년(순조 32)에 세운 사당이다. 1970년대 초 영정을 도난당해 현재는 위패만 모시고 있다.
  
정규한은 조선 후기의 학자이며 호는 화산(華山) 또는 운수산인(雲水山人)이다. 정조 4년(1780)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성리학 연구에 열중하였다.
+
정규한은 1780년 과거에 급제했으나 관직에 오르지 않고, 고향인 공주에서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며 향약을 정비하였다. 그는 화산정사(華山精舍)를 지어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자연을 좋아하는 문장가로도 이름을 날렸다. 1795년(정조 19)에 임금이 유생들의 글을 평가하는 자리에서 그의 글이 고시(古詩) 부분의 으뜸으로 뽑혀 왕으로부터 직접 『주서백선(朱書百選)』을 받았다고 한다. 『주서백선』은 정조가 주자의 편지 중에서 100편을 뽑아 모은 책으로 당시 일반인에게는 널리 배포되지 않아 큰 영광으로 여겼다.  
  
산수와 자연을 좋아하고 시문을 즐겨 문장가로도 유명하였으며 저서로는 <화산집>이 있다. 사당 뒤쪽에 묘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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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한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제자와 지역 유생들이 영당을 세웠으며 이후 여러 차례 고쳐 지었다. 사당 뒤편에는 정규한의 묘가 있다.
  
유림들은 1962년 사당을 중수하면서 화산영당의 명칭을 화산사(華山祠)로 개칭하였다.
+
===영문===
 +
'''Hwasanyeongdang Shrine'''
  
===수정 국문===
+
Hwasanyeongdang Shrine was established in 1832 to enshrine a portrait of the prominent Confucian scholar Jeong Gyu-han (1750-1824, pen name: Hwasan). The portrait was stolen from the shrine in the early 1970s, and only his spirit tablet remains inside.
====초고====
 
영당은 영정(影幀)을 모셔 둔 사당이다. 계룡면 화은리에 위치한 화산영당은 조선후기 공주를 대표하는 문장가 정규한(鄭奎漢, 1750~1824)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1832년(순조 32)에 건립된 사당으로, 정규한의 자인 화산(華山)에서 이름 붙여졌다.  
 
  
정규한의 영당은 그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도학을 숭모하였던 지역 사림들이 청원함에 따라 그의 고향에 창건되었다. 영당의 건립은 정규한이 생전 화산 아래에 화산정사(華山精舍)를 짓고 학문을 가르친 데서 비롯되었다. 영당이 건립된 후에는 1835년 묘비 건립, 1858년 사헌부지평 증직 등 일련의 추숭 활동이 이어졌다. 영당은 건립 후 40여 년이 지난 1871년 1차 중수, 1931년 2차 중수, 1953년과 1961년 재차 중수되었고, 1962년 후손들에 의해 화산영당의 명칭이 화산사(華山祠)로 개칭되었다. 안타깝게도 정규한의 영정이 1970년대 초 도난당해 현재는 위패로 대신하여 모시고 있다. 사당의 뒤편에는 그의 묘소가 있다.
+
Jeong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780 but did not seek the career of a civil official and instead devoted his life to teaching. In his hometown of Gongju, he founded Hwasanjeongsa Study Hall where he taught his students. Jeong was known for his excellent writing skills and his love of nature. In 1795, when King Jeongjo (r. 1776-1800) gathered works written by scholars from around the country for evaluation, he chose a piece written by Jeong as the best in the category of old-style poetry. In recognition of his talent, the king presented Jeong with a copy of ''One Hundred Selected Works of Zhu Xi'' (Juseo baekseon), a compilation of the works of the Confucian sage Zhu Xi (1130-1200) selected by King Jeongjo. Due to the great rarity of the book, to receive it as a gift from the king was considered a great honor.
  
정규한은 공주를 대표하는 학자로 1780년(정조 4)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성리학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또한, 정규한은 문장가로도 이름을 날렸는데 몇 가지 일화가 전해진다. 1790년(정조 14) 성균관시에서 정조가 직접 정국의 상황과 계책을 묻는 질문을 하였는데, 당시 정규한의 대답이 가장 돋보였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1795년(정조 19) 유생들의 글을 평가하는 자리에서도 고시(古詩) 부분 중 으뜸으로 꼽혀 왕으로부터 직접 『주자백선』을 하사받았다. 그의 저서로는 <화산집>이 있다.
+
This shrine was established after Jeong’s death by his students and local Confucian scholars. It has since undergone several renovations. Jeong’s tomb is located behind the shrine.
  
====초고 수정====
+
===영문 해설 내용===
이곳은 조선시대의 학자 화산 정규한(華山 鄭奎漢, 1750-1824)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지어진 사당이다.
+
화산영당은 조선시대의 학자 정규한(1750-1824, 호: 화산)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1832년에 세운 사당이다. 1970년대 초 영정을 도난당해 현재는 위패만 모시고 있다.
  
정규한은 1780년 과거에 합격했지만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인 공주에서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으며, 공주 지역의 향약을 정비하였다. 그는 화산정사(華山精舍)를 지어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기도 하였으며, 산수와 자연을 좋아하는 문장가로도 이름을 날렸다. 정조 19년(1795) 임금이 유생들의 글을 평가하는 자리에서 고시(古詩) 부분의 으뜸으로 꼽혀 왕으로부터 직접 『주자백선』을 하사받았다는 일화가 전한다.
+
정규한은 1780년 과거에 급제했으나, 관직에 오르지 않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고향인 공주에서 화산정사를 지어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자연을 좋아하는 문장가로도 이름을 날렸다. 1795년 정조(재위 1776-1800)유생들의 글을 모아 평가하였는데, 정규한이 지은 글이 고시(古詩) 부분의 으뜸으로 꼽혀 왕으로부터 직접 『주서백선』이라는 책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주서백선』은 정조가 주자의 편지 100편을 친히 뽑아 모은 책으로, 당시 일반인에게는 널리 배포되지 않아 사람들이 큰 영광으로 여겼다.
  
영당은 정규한의 제자와 지역 유생들에 의해 순조 32(1832)에 세워진 이후 여러 차례 중수되었으며, 1962년에 화산사(華山祠)로 개칭되었다. 건물의 이름은 정규한의 호를 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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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한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제자와 지역 유생들이 영당을 세웠고, 이후 여러 차례 고쳐 지었다. 사당 뒤편에는 정규한의 묘가 있다.
 
 
1970년대 초에 영정을 도난당해 안에는 위패가 대신 모셔져 있으며, 이곳에서는 매년 가을에 제사를 올린다.
 
 
 
사당의 뒤편에는 그의 묘소가 있다.
 
 
 
====1차 수정====
 
화산영당은 조선시대의 학자 화산 정규한(華山 鄭奎漢, 1750~1824)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순조 32년(1832)에 건립된 사당이다. 안타깝게도 1970년대 초 영정을 도난당해, 현재 사당 안에는 위패가 대신 모셔져 있다.
 
 
 
정규한은 1780년 과거에 합격했지만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인 공주에서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며 향약을 정비하였다. 그는 화산정사(華山精舍)를 지어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기도 하였으며, 산수와 자연을 좋아하는 문장가로도 이름을 날렸다. 정조 19년(1795) 임금이 유생들의 글을 평가하는 자리에서 고시(古詩) 부분의 으뜸으로 꼽혀 왕으로부터 직접 『주서백선(朱書百選)』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주서백선』은 정조가 주자의 편지 중에서 100편을 친히 뽑아 모은 책으로, 당시 일반인들에게는 널리 배포되지 않아 사람들이 큰 영광으로 여겼다.
 
 
 
영당은 정규한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제자와 지역 유생들에 의해 세워졌으며, 이후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 사당의 뒤편에는 정규한의 묘소가 있다.
 
 
 
====자문의견====
 
# 분야별 자문위원 1
 
#*당시 일반인들에게는 널리 배포되지 않아 <del>사람들이</del> 큰 영광으로 여겼다.
 
#*이후 여러 차례 중수('''''설명 : 낡고 헌 건물을 손질하여 고침''''')되었다.
 
# 분야별 자문위원 2
 
#*<del>안타깝게도</del> 1970년대 초 영정을 도난당해,
 
#*정조 19년(1795) 임금이 유생들의 글을 평가하는 자리에서 '''''그가 지은 글이''''' 고시(古詩) 부분의 으뜸으로 꼽혀
 
#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정규한은 1780년 과거에 합격했지만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대신''' 고향인 공주에서 성리학연구에 몰두하며 향약을 정비하였다. 그는 화산정사(華山精舍)를 지어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기도 하였으며, '''산수와 자연(산수와 자연은 중복된 의미임)'''을 좋아하는 문장가로도 이름을 날렸다. 정조 19년(1795) 임금이 유생들의 글을 평가하는 자리에서 고시(古詩) 부분의 으뜸으로 꼽혀 왕으로부터 직접 『주서백선(朱書百選)』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주서백선』은 정조가 주자의 편지 중에서 100편을 친히 뽑아 모은 책으로, 당시 일반인들에게는 널리 배포되지 않아 사람들이 큰 영광으로 여겼다. <br/> 영당은 정규한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제자와 지역 유생들에 의해 세워졌으며, 이후 여러 차례 '''개·보수'''되었다. 사당의 뒤편에는 정규한의 묘소가 있다.''
 
 
 
====2차 수정====
 
화산영당은 조선시대의 학자 화산 정규한(華山 鄭奎漢, 1750~1824)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순조 32년(1832)에 건립된 사당이다. 1970년대 초 영정을 도난당해, 현재 사당 안에는 위패가 대신 모셔져 있다.
 
 
 
정규한은 1780년 과거에 합격했지만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인 공주에서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며 향약을 정비하였다. 그는 화산정사(華山精舍)를 지어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기도 하였으며, 자연을 좋아하는 문장가로도 이름을 날렸다. 정조 19년(1795) 임금이 유생들의 글을 평가하는 자리에서 그가 지은 글이 고시(古詩) 부분의 으뜸으로 꼽혀 왕으로부터 직접 『주서백선(朱書百選)』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주서백선』은 정조가 주자의 편지 중에서 100편을 친히 뽑아 모은 책으로, 당시 일반인들에게는 널리 배포되지 않아 사람들이 큰 영광으로 여겼다.
 
 
 
영당은 정규한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제자와 지역 유생들에 의해 세워졌으며, 이후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 사당의 뒤편에는 정규한의 묘소가 있다.
 
  
 
=='''문맥요소'''==
 
=='''문맥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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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2021 영문집필]]

2021년 9월 22일 (수) 11:55 기준 최신판

화산영당
Hwasanyeongdang Shrine
화산영당,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화산영당
영문명칭 Hwasanyeongdang Shrine
한자 華山影堂
주소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만가리길 14
지정번호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69호
지정일 1984년 5월 17일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사우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화산영당,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화산영당은 조선 시대의 학자 화산 정규한(華山 鄭奎漢, 1750~1824)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1832년(순조 32)에 세운 사당이다. 1970년대 초 영정을 도난당해 현재는 위패만 모시고 있다.

정규한은 1780년 과거에 급제했으나 관직에 오르지 않고, 고향인 공주에서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며 향약을 정비하였다. 그는 화산정사(華山精舍)를 지어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자연을 좋아하는 문장가로도 이름을 날렸다. 1795년(정조 19)에 임금이 유생들의 글을 평가하는 자리에서 그의 글이 고시(古詩) 부분의 으뜸으로 뽑혀 왕으로부터 직접 『주서백선(朱書百選)』을 받았다고 한다. 『주서백선』은 정조가 주자의 편지 중에서 100편을 뽑아 모은 책으로 당시 일반인에게는 널리 배포되지 않아 큰 영광으로 여겼다.

정규한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제자와 지역 유생들이 영당을 세웠으며 이후 여러 차례 고쳐 지었다. 사당 뒤편에는 정규한의 묘가 있다.

영문

Hwasanyeongdang Shrine

Hwasanyeongdang Shrine was established in 1832 to enshrine a portrait of the prominent Confucian scholar Jeong Gyu-han (1750-1824, pen name: Hwasan). The portrait was stolen from the shrine in the early 1970s, and only his spirit tablet remains inside.

Jeong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780 but did not seek the career of a civil official and instead devoted his life to teaching. In his hometown of Gongju, he founded Hwasanjeongsa Study Hall where he taught his students. Jeong was known for his excellent writing skills and his love of nature. In 1795, when King Jeongjo (r. 1776-1800) gathered works written by scholars from around the country for evaluation, he chose a piece written by Jeong as the best in the category of old-style poetry. In recognition of his talent, the king presented Jeong with a copy of One Hundred Selected Works of Zhu Xi (Juseo baekseon), a compilation of the works of the Confucian sage Zhu Xi (1130-1200) selected by King Jeongjo. Due to the great rarity of the book, to receive it as a gift from the king was considered a great honor.

This shrine was established after Jeong’s death by his students and local Confucian scholars. It has since undergone several renovations. Jeong’s tomb is located behind the shrine.

영문 해설 내용

화산영당은 조선시대의 학자 정규한(1750-1824, 호: 화산)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1832년에 세운 사당이다. 1970년대 초 영정을 도난당해 현재는 위패만 모시고 있다.

정규한은 1780년 과거에 급제했으나, 관직에 오르지 않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고향인 공주에서 화산정사를 지어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자연을 좋아하는 문장가로도 이름을 날렸다. 1795년 정조(재위 1776-1800)가 유생들의 글을 모아 평가하였는데, 정규한이 지은 글이 고시(古詩) 부분의 으뜸으로 꼽혀 왕으로부터 직접 『주서백선』이라는 책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주서백선』은 정조가 주자의 편지 100편을 친히 뽑아 모은 책으로, 당시 일반인에게는 널리 배포되지 않아 사람들이 큰 영광으로 여겼다.

정규한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제자와 지역 유생들이 영당을 세웠고, 이후 여러 차례 고쳐 지었다. 사당 뒤편에는 정규한의 묘가 있다.

문맥요소

Nodes

ID Class Label Description
화산영당 Place 화산영당
L34-0069-0000 Heritage (충청남도_문화재자료_제69호)_화산영당
정규한 Actor 정규한(鄭奎漢,_1750~1824)
조선_정조 Actor 조선_정조(正祖,_재위_1776-1800)
주서백선 Record 주서백선(朱書百選) 정조가 주자의 편지 중에서 100편을 친히 뽑아 모은 책. 정규한은 정조에게 이 책을 직접 하사받았다.
정규한_묘 Object 정규한_묘
화산정사 Place 화산정사 정규한이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세웠던 강학당.
송환기 Actor 송환기(宋煥箕,_1728-1807)

Links

Source Target Rel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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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한 화산영당 isEnshrinedIn
정규한 조선_정조 isRelatedTo
정규한 주서백선 isRelatedTo
조선_정조 주서백선 contributor
화산영당 정규한 isNamesakeOf
화산영당 정규한_묘 isNear
송환기 정규한 hasDisciple
정규한 화산정사 founder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