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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암 이간 사당(아산 외암마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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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암 이간 사당은 이간(李柬, 1677∼1727)을 모신 사당이다. 이간의 자는 공거(公擧), 호는 외암(巍巖) 또는 추월헌(秋月軒)이며, 본관은 예안(禮安)으로 입향조(入鄕組)*인 '''이사종(李嗣宗)의 6대손'''이다.  
 
외암 이간 사당은 이간(李柬, 1677∼1727)을 모신 사당이다. 이간의 자는 공거(公擧), 호는 외암(巍巖) 또는 추월헌(秋月軒)이며, 본관은 예안(禮安)으로 입향조(入鄕組)*인 '''이사종(李嗣宗)의 6대손'''이다.  
  
이간은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과거를 치르지 않았다. 학식과 덕망이 높은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1716년(숙종 42) 세자시강원 자의, 1726년영조 2 경연관, 충청도사 겸 해운판관 등 여러 관직이 내려졌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다만 1725년(영조 1)에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회덕현감으로 나아갔으나 뜻을 펼칠 수 없자 수개월 만에 사직하였다. 그가 죽은 후 1777년(정조 1)에 이조참판, 성균관좨주, 1811년(순조 1)에 이조판서에 추증(追贈)***되고 문정(文正)의 시호를 받았다. 이를 계기로 불천위(不遷位)****로 정해져 묘를 마을 옆으로 이장하고, 외암정사관선를 이간의 위패를 모신 외암서사(巍巖書社)로 이름을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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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간은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과거를 치르지 않았다. 학식과 덕망이 높은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1716년(숙종 42) 세자시강원 자의, 1726년(영조 2) 경연관, 충청도사 겸 해운판관 등 여러 관직이 내려졌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다만 1725년(영조 1)에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회덕현감으로 나아갔으나 뜻을 펼칠 수 없자 수개월 만에 사직하였다. 그가 죽은 후 1777년(정조 1)에 이조참판, 성균관좨주, 1811년(순조 1)에 이조판서에 추증(追贈)***되고 문정(文正)의 시호를 받았다. 이를 계기로 불천위(不遷位)****로 정해져 묘를 마을 옆으로 이장하고, 외암정사관선를 이간의 위패를 모신 외암서사(巍巖書社)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간은 율곡(栗谷)을 태두로 하는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이름난 성리학자로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 1641~1721) 문하의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 중 으뜸이다.
 
이간은 율곡(栗谷)을 태두로 하는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이름난 성리학자로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 1641~1721) 문하의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 중 으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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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증(追贈): 나라에 공이 있는 벼슬아치나 그의 선조에게 죽은 뒤에 품계를 높여 주던 일
 
* 추증(追贈): 나라에 공이 있는 벼슬아치나 그의 선조에게 죽은 뒤에 품계를 높여 주던 일
 
* 불천위(不遷位): 나라에 공이 있거나 도덕성과 학문이 높은 사람의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보관할 수 있도록 허락한 사당
 
* 불천위(不遷位): 나라에 공이 있거나 도덕성과 학문이 높은 사람의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보관할 수 있도록 허락한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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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해설 내용===
 
===영문 해설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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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조선시대의 대학자 이간(1677-1727)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이간은 예안이씨 중 외암마을에 처음으로 정착한 이사종의 5대손으로 외암마을을 대표하는 인물이며, 마을의 이름은 이간의 호를 따라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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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유교 전통에 따르면 사당에는 4대조까지의 위패를 모실 수 있다. 그러나 나라에 특별한 공훈이 있거나 도덕성과 학문이 높은 사람의 경우는 위패를 영원히 모실 수 있다. 이간의 사당이 바로 이러한 경우이며, 외암마을의 동쪽 끝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여 위계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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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간은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었다. 과거를 치르지 않았으나 높은 학식과 덕망으로 이름이 알려져 천거를 받았고, 여러 차례 관직이 내려졌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이간이 임명되었던 자리는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관직과 왕에게 학문과 정치의 도리 등을 강론하는 관직이었다. 1725년 회덕(지금의 대전) 현감으로 나아갔으나 불과 수개월 만에 사직하였다. 1777년 이조참판, 1811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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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성리학에서는 인간의 본성과 인간을 제외한 만물의 본성이 근본적으로 같은가 다른가를 두고 논쟁이 발생하였다. 이간은 두 본성이 서로 같다고 설명하는 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외암 이간 사당은 이간(李柬, 1677∼1727)을 모신 사당이다. 이간의 자는 공거(公擧), 호는 외암(巍巖) 또는 추월헌(秋月軒)이며, 본관은 예안(禮安)으로 입향조(入鄕組)*인 이사종(李嗣宗)의 6대손이다.
 
  
이간은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과거를 치르지 않았다. 학식과 덕망이 높은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1716년(숙종 42) 세자시강원 자의, 1726년영조 2 경연관, 충청도사 겸 해운판관 등 여러 관직이 내려졌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다만 1725년(영조 1)에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회덕현감으로 나아갔으나 뜻을 펼칠 수 없자 수개월 만에 사직하였다. 그가 죽은 후 1777년(정조 1)에 이조참판, 성균관좨주, 1811년(순조 1)에 이조판서에 추증(追贈)***되고 문정(文正)의 시호를 받았다. 이를 계기로 불천위(不遷位)****로 정해져 묘를 마을 옆으로 이장하고, 외암정사관선를 이간의 위패를 모신 외암서사(巍巖書社)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간은 율곡(栗谷)을 태두로 하는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이름난 성리학자로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 1641~1721) 문하의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 중 으뜸이다.
 
  
 
그의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은 융화적 세계관, 이신론적(理神論的) 가치관을 바탕으로 체계화한 보통주의적(普通主義的) 철학 사상이다. 인물성동론은 조선 후기 최대 학술 논쟁인 호락논변(湖洛論辨)의 실마리가 되었다. 인물성동론은 뒤를 이어 인물균론(人物均論), 인물막변론(人物莫辯論)으로 발전하여 북학파 형성에 영향을 주었으며 조선 후기 통치 이념으로 변화되어 소인교화론, 탕평론, 서얼소통론 등 혁파 논리의 기조가 된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은 융화적 세계관, 이신론적(理神論的) 가치관을 바탕으로 체계화한 보통주의적(普通主義的) 철학 사상이다. 인물성동론은 조선 후기 최대 학술 논쟁인 호락논변(湖洛論辨)의 실마리가 되었다. 인물성동론은 뒤를 이어 인물균론(人物均論), 인물막변론(人物莫辯論)으로 발전하여 북학파 형성에 영향을 주었으며 조선 후기 통치 이념으로 변화되어 소인교화론, 탕평론, 서얼소통론 등 혁파 논리의 기조가 된 것으로 평가된다.
 
입향조(入鄕組): 마을에 들어와 터를 잡은 선조
 
유일(遺逸): 조선 초기에 초야에 묻힌 재능있는 선비를 천거하여 관직에 임명하던 제도
 
추증(追贈): 나라에 공이 있는 벼슬아치나 그의 선조에게 죽은 뒤에 품계를 높여 주던 일
 
불천위(不遷位): 나라에 공이 있거나 도덕성과 학문이 높은 사람의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보관할 수 있도록 허락한 사당
 
  
  

2023년 5월 2일 (화) 09:34 판


외암 이간 사당 巍巖 李柬 祠堂
Goto.png 종합안내판: 아산 외암마을



해설문

국문

외암 이간 사당은 이간(李柬, 1677∼1727)을 모신 사당이다. 이간의 자는 공거(公擧), 호는 외암(巍巖) 또는 추월헌(秋月軒)이며, 본관은 예안(禮安)으로 입향조(入鄕組)*인 이사종(李嗣宗)의 6대손이다.

이간은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과거를 치르지 않았다. 학식과 덕망이 높은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1716년(숙종 42) 세자시강원 자의, 1726년(영조 2) 경연관, 충청도사 겸 해운판관 등 여러 관직이 내려졌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다만 1725년(영조 1)에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회덕현감으로 나아갔으나 뜻을 펼칠 수 없자 수개월 만에 사직하였다. 그가 죽은 후 1777년(정조 1)에 이조참판, 성균관좨주, 1811년(순조 1)에 이조판서에 추증(追贈)***되고 문정(文正)의 시호를 받았다. 이를 계기로 불천위(不遷位)****로 정해져 묘를 마을 옆으로 이장하고, 외암정사관선를 이간의 위패를 모신 외암서사(巍巖書社)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간은 율곡(栗谷)을 태두로 하는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이름난 성리학자로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 1641~1721) 문하의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 중 으뜸이다.

그의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은 융화적 세계관, 이신론적(理神論的) 가치관을 바탕으로 체계화한 보통주의적(普通主義的) 철학 사상이다. 인물성동론은 조선 후기 최대 학술 논쟁인 호락논변(湖洛論辨)의 실마리가 되었다. 인물성동론은 뒤를 이어 인물균론(人物均論), 인물막변론(人物莫辯論)으로 발전하여 북학파 형성에 영향을 주었으며 조선 후기 통치 이념으로 변화되어 소인교화론, 탕평론, 서얼소통론 등 혁파 논리의 기조가 된 것으로 평가된다.


  • 입향조(入鄕組): 마을에 들어와 터를 잡은 선조
  • 유일(遺逸): 조선 초기에 초야에 묻힌 재능있는 선비를 천거하여 관직에 임명하던 제도
  • 추증(追贈): 나라에 공이 있는 벼슬아치나 그의 선조에게 죽은 뒤에 품계를 높여 주던 일
  • 불천위(不遷位): 나라에 공이 있거나 도덕성과 학문이 높은 사람의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보관할 수 있도록 허락한 사당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이곳은 조선시대의 대학자 이간(1677-1727)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이간은 예안이씨 중 외암마을에 처음으로 정착한 이사종의 5대손으로 외암마을을 대표하는 인물이며, 마을의 이름은 이간의 호를 따라 지어졌다.

한국의 유교 전통에 따르면 사당에는 4대조까지의 위패를 모실 수 있다. 그러나 나라에 특별한 공훈이 있거나 도덕성과 학문이 높은 사람의 경우는 위패를 영원히 모실 수 있다. 이간의 사당이 바로 이러한 경우이며, 외암마을의 동쪽 끝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여 위계를 보여준다.

이간은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었다. 과거를 치르지 않았으나 높은 학식과 덕망으로 이름이 알려져 천거를 받았고, 여러 차례 관직이 내려졌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이간이 임명되었던 자리는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관직과 왕에게 학문과 정치의 도리 등을 강론하는 관직이었다. 1725년 회덕(지금의 대전) 현감으로 나아갔으나 불과 수개월 만에 사직하였다. 1777년 이조참판, 1811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조선 후기 성리학에서는 인간의 본성과 인간을 제외한 만물의 본성이 근본적으로 같은가 다른가를 두고 논쟁이 발생하였다. 이간은 두 본성이 서로 같다고 설명하는 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의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은 융화적 세계관, 이신론적(理神論的) 가치관을 바탕으로 체계화한 보통주의적(普通主義的) 철학 사상이다. 인물성동론은 조선 후기 최대 학술 논쟁인 호락논변(湖洛論辨)의 실마리가 되었다. 인물성동론은 뒤를 이어 인물균론(人物均論), 인물막변론(人物莫辯論)으로 발전하여 북학파 형성에 영향을 주었으며 조선 후기 통치 이념으로 변화되어 소인교화론, 탕평론, 서얼소통론 등 혁파 논리의 기조가 된 것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