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행중

"월정교(경주 춘양교지와 월정교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Heritage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새 문서: {{진행중}} {{개별안내판 |사진= |사진출처= |대표명칭=月精橋 |영문명칭=Woljeonggyo Bridge |한자=月精橋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921-1번...)
 
(해설문)
14번째 줄: 14번째 줄:
 
경주 남천(南川)은 사천(沙川) 또는 문천(蚊川)이라고도 하며, 월성 남쪽으로 흘러 신라 도성의 자연방어시설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궁성인 월성(사적 제16호)의 자연 해자(垓子) 기능을 하였다.  
 
경주 남천(南川)은 사천(沙川) 또는 문천(蚊川)이라고도 하며, 월성 남쪽으로 흘러 신라 도성의 자연방어시설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궁성인 월성(사적 제16호)의 자연 해자(垓子) 기능을 하였다.  
  
󰡔삼국사기󰡕에 경덕왕 19년(760) 궁궐 남쪽 문천 위에 월정교와 춘양교 두 다리를 놓았다고 한다. 고려 충렬왕 6년(1280)에 월정교를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어 최소 520년간 다리의 기능을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
『삼국사기』에 경덕왕 19년(760) 궁궐 남쪽 문천 위에 월정교와 춘양교 두 다리를 놓았다고 한다. 고려 충렬왕 6년(1280)에 월정교를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어 최소 520년간 다리의 기능을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월정교는 발굴조사 결과, 다리 양쪽에 교대(橋臺 : 다리의 양쪽 끝을 받치는 대)와 날개벽이 있고 평면형태가 배모양인 4개의 교각(橋脚)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리의 길이는 60.57m이다. 교각을 배 모양으로 만든 것은 물의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불에 탄 목재와 기와 조각 등이 발견되어 다리는 기와지붕을 올린 누각(樓閣)의 모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018년에 교각과 누교(樓橋), 문루(門樓)를 갖춘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월정교는 발굴조사 결과, 다리 양쪽에 교대(橋臺 : 다리의 양쪽 끝을 받치는 대)와 날개벽이 있고 평면형태가 배모양인 4개의 교각(橋脚)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리의 길이는 60.57m이다. 교각을 배 모양으로 만든 것은 물의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불에 탄 목재와 기와 조각 등이 발견되어 다리는 기와지붕을 올린 누각(樓閣)의 모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018년에 교각과 누교(樓橋), 문루(門樓)를 갖춘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2021년 8월 15일 (일) 11:26 판


月精橋 月精橋
Woljeonggyo Bridge
Goto.png 종합안내판: 경주 춘양교지와 월정교지



해설문

국문

경주 남천(南川)은 사천(沙川) 또는 문천(蚊川)이라고도 하며, 월성 남쪽으로 흘러 신라 도성의 자연방어시설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궁성인 월성(사적 제16호)의 자연 해자(垓子) 기능을 하였다.

『삼국사기』에 경덕왕 19년(760) 궁궐 남쪽 문천 위에 월정교와 춘양교 두 다리를 놓았다고 한다. 고려 충렬왕 6년(1280)에 월정교를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어 최소 520년간 다리의 기능을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월정교는 발굴조사 결과, 다리 양쪽에 교대(橋臺 : 다리의 양쪽 끝을 받치는 대)와 날개벽이 있고 평면형태가 배모양인 4개의 교각(橋脚)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리의 길이는 60.57m이다. 교각을 배 모양으로 만든 것은 물의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불에 탄 목재와 기와 조각 등이 발견되어 다리는 기와지붕을 올린 누각(樓閣)의 모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018년에 교각과 누교(樓橋), 문루(門樓)를 갖춘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동쪽 상류에 있는 춘양교지와 함께 통일신라시대 교량의 구조와 축조기술을 살펴볼 수 있는 고고학 자료로써, 당시에는 문천으로 단절된 월성의 북쪽과 남쪽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영문

Woljeonggyo Brid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