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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해설문'''==
===기존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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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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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1869~1953)의 묘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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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영은 대한 제국의 신진 개화 관료로서 17세부터 관직 생활을 시작해 외교부 교섭국장, 한성재판소 소장, 평안감사인 평안남도 관찰사 등을 거쳐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냈다.
  
===수정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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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자 이시영은 형제와 가족 40여 명과 중국으로 떠났다. 그는 중국에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수많은 독립군을 양성하여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또한, 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주도하였고 법무총장, 재무총장을 지내며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임시정부를 끝까지 지켰다. 광복된 뒤에는 귀국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건학 이념을 잇고 인재를 양성하고자 1947년 지금의 경희대학교인 성재학원 신흥대학을 세웠다.
====초고====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정부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李始榮, 1868~1953)의 묘소이다.
 
  
그는 고종 22년(1885)에 관직에 나아가 10여 년간 여러 요직을 지냈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강제로 체결되자, 사직을 하였다. 관직에 있는 동안 근대식 학교를 설립하였고, 독립정신과 애국정신을 고취하는데 힘썼다. 일제 강점 후에는 만주의 서간도로 이주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고,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도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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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7월 20일 제헌 국회에서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 되었고, 1951년 5월 9일 이승만 독재 정권에 항의하며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성명서에 ‘시위소찬*’이라는 말을 남겼다. 1953년 4월 17일 85세 때 피난처인 부산 동래에서 서거하였고, 전쟁 중임에도 여야는 만장일치로 국민장에 합의하였다. 9일 동안 장례를 치른 뒤 정릉 묘소에 묻혔다가 1964년 이곳으로 옮겨졌다. 국가에서는 이시영의 공훈을 기려 1949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주었다.  
  
1945년 조국의 광복을 맞아 귀국하였고, 1948년에는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냈으며, 이듬해에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그러나 1951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의 전횡에 반대하여 사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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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는 돌을 2단으로 높게 쌓아 올린 석축 위에 있다. 봉분 아래쪽에는 병풍석을 둘렀고, 봉분 앞에는 제물을 차려 놓는 상석, 향로를 올리는 향로석, 불을 밝히는 장명등, 문인 모양의 문인석, 한 쌍의 돌기둥인 망주석 등 돌로 만든 석물들이 있다. 계단 아래 숲 가에는 ‘성재선생경주이공시영지묘’라고 새긴 묘비가 있다.
1947년 재단법인 성재학원(省齋學園)을 설립하였는데, 이후 신흥전문학관으로 발전하였으며, 한국전쟁으로 잠시 침체되기도 하였으나, 현재의 경희대학교로 계승되었다. 그는 1953년 부산에서 별세하였으며, 9일간의 국민장으로 정릉동에 안장되었다가, 1964년에 현재의 장소로 이장되었다.
 
  
묘소는 2단의 높은 석축과 계단 위에 조성되어 있다. 봉분은 원형으로 병풍석을 둘렀고, 상석, 향로석, 장명등, 문인석, 망주석이 설치되어 있다. 계단 아래 숲가에는 “성재선생경주이공시영지묘(省齋先生慶州李公始榮之墓)”라고 새긴 묘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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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소찬: 벼슬아치가 맡은 일을 하지 못하고 나라에서 주는 곡식이나 재물만 받아먹음
  
====1차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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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李始榮, 1868~1953)의 묘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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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mb of Yi Si-yeong, Seoul'''
  
이시영은 서울의 명가 출신으로, 조선 중기의 영의정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10대손이며 한성부판윤과 형조판서 등을 지낸 이유승(李裕承, 1835~?)의 다섯째 아들이다. 1885년 관직에 나아가 여러 요직을 지냈으나,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사직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다시 평안남도 관찰사로 임명되었고, 부임지에서 근대학교 설립 및 애국계몽운동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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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해설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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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1868-1953)의 묘소이다.
  
1910년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뒤에는 가족들을 모두 이끌고 만주의 서간도로 이주하였고,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초대 법무총장에 선임되었고, 1930년에는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다. 광복 이후 1948년에는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이듬해에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그러나 1951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의 전횡에 반대하여 사임하였다. 1953년 부산에서 별세하였으며, 9일간의 국민장으로 정릉동에 안장되었다가, 1964년 현재의 장소로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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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영은 대한 제국의 신진 개화 관료로서 1885년부터 관직 생활을 시작해 외교부 교섭국장, 한성재판소 소장, 평안감사인 평안남도 관찰사 등을 거쳤다.
  
이시영의 묘소는 2단의 높은 석축 위에 조성되어 있다. 봉분은 아래쪽에는 병풍석을 둘렀고, 봉분 앞에는 상석, 향로석, 장명등, 문인석, 망주석 등의 석물을 두었다. 계단 아래 숲가에는 “성재선생경주이공시영지묘(省齋先生慶州李公始榮之墓)”라고 새긴 묘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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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자, 이시영은 형제와 가족 40여 명과 중국으로 떠났다. 그는 중국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수많은 독립군을 양성하여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또한, 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주도하였고 법무총장, 재무총장을 지내며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임시정부를 끝까지 지켰다. 광복된 뒤에는 귀국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건학 이념을 잇고 인재를 양성하고자 1947년 지금의 경희대학교인 성재학원 신흥대학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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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7월 20일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 되었고, 1951년 5월 9일 이승만 독재 정권에 항의하며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가 1953년 4월 17일 부산에서 서거하였고, 전쟁 중임에도 여야는 만장일치로 국민장에 합의하였다. 9일 동안 장례를 치른 뒤 정릉동에 묻혔다가 1964년 이곳으로 옮겨졌다. 국가에서는 이시영의 공훈을 기려 1949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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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는 2단의 높은 석축 위에 조성되어 있다. 봉분 아래쪽에는 병풍석을 둘렀고, 봉분 앞에는 상석, 향로석, 장명등, 문인석, 망주석 등의 석물을 두었다. 계단 아래 숲가에는 묘비가 있다.
  
 
=='''문맥요소'''==
 
=='''문맥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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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묘]]
 
[[분류:묘]]
 
[[분류:2021 국문집필]]
 
[[분류:2021 국문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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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2021 영문집필]]

2021년 7월 26일 (월) 20:23 판


서울 이시영 묘소
Tomb of Yi Si-yeong, Seoul
파일:서울이시영묘소.jpg
서울 이시영 묘소,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서울 이시영 묘소
영문명칭 Tomb of Yi Si-yeong, Seoul
한자 서울 李始榮 墓所
지정번호 국가등록문화재 제516호
지정일 2012년 10월 19일
분류 등록문화재/기타/인물기념시설
시대 기타
수량/면적 현항측량면적 1,394㎡
웹사이트 서울 이시영 묘소,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1869~1953)의 묘소이다.

이시영은 대한 제국의 신진 개화 관료로서 17세부터 관직 생활을 시작해 외교부 교섭국장, 한성재판소 소장, 평안감사인 평안남도 관찰사 등을 거쳐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냈다.

1910년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자 이시영은 형제와 가족 40여 명과 중국으로 떠났다. 그는 중국에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수많은 독립군을 양성하여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또한, 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주도하였고 법무총장, 재무총장을 지내며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임시정부를 끝까지 지켰다. 광복된 뒤에는 귀국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건학 이념을 잇고 인재를 양성하고자 1947년 지금의 경희대학교인 성재학원 신흥대학을 세웠다.

1948년 7월 20일 제헌 국회에서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 되었고, 1951년 5월 9일 이승만 독재 정권에 항의하며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성명서에 ‘시위소찬*’이라는 말을 남겼다. 1953년 4월 17일 85세 때 피난처인 부산 동래에서 서거하였고, 전쟁 중임에도 여야는 만장일치로 국민장에 합의하였다. 9일 동안 장례를 치른 뒤 정릉 묘소에 묻혔다가 1964년 이곳으로 옮겨졌다. 국가에서는 이시영의 공훈을 기려 1949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주었다.

묘소는 돌을 2단으로 높게 쌓아 올린 석축 위에 있다. 봉분 아래쪽에는 병풍석을 둘렀고, 봉분 앞에는 제물을 차려 놓는 상석, 향로를 올리는 향로석, 불을 밝히는 장명등, 문인 모양의 문인석, 한 쌍의 돌기둥인 망주석 등 돌로 만든 석물들이 있다. 계단 아래 숲 가에는 ‘성재선생경주이공시영지묘’라고 새긴 묘비가 있다.


  • 시위소찬: 벼슬아치가 맡은 일을 하지 못하고 나라에서 주는 곡식이나 재물만 받아먹음

영문

Tomb of Yi Si-yeong, Seoul

영문 해설 내용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1868-1953)의 묘소이다.

이시영은 대한 제국의 신진 개화 관료로서 1885년부터 관직 생활을 시작해 외교부 교섭국장, 한성재판소 소장, 평안감사인 평안남도 관찰사 등을 거쳤다.

1910년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자, 이시영은 형제와 가족 40여 명과 중국으로 떠났다. 그는 중국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수많은 독립군을 양성하여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또한, 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주도하였고 법무총장, 재무총장을 지내며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임시정부를 끝까지 지켰다. 광복된 뒤에는 귀국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건학 이념을 잇고 인재를 양성하고자 1947년 지금의 경희대학교인 성재학원 신흥대학을 세웠다.

1948년 7월 20일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 되었고, 1951년 5월 9일 이승만 독재 정권에 항의하며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가 1953년 4월 17일 부산에서 서거하였고, 전쟁 중임에도 여야는 만장일치로 국민장에 합의하였다. 9일 동안 장례를 치른 뒤 정릉동에 묻혔다가 1964년 이곳으로 옮겨졌다. 국가에서는 이시영의 공훈을 기려 1949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주었다.

묘소는 2단의 높은 석축 위에 조성되어 있다. 봉분 아래쪽에는 병풍석을 둘렀고, 봉분 앞에는 상석, 향로석, 장명등, 문인석, 망주석 등의 석물을 두었다. 계단 아래 숲가에는 묘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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