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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당은 영정(影幀)을 모셔 둔 사당이다. 계룡면 화은리에 위치한 화산영당은 조선후기 공주를 대표하는 문장가 정규한(鄭奎漢, 1750~1824)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1832년(순조 32)에 건립된 사당으로, 정규한의 자인 화산(華山)에서 이름 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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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한의 영당은 그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도학을 숭모하였던 지역 사림들이 청원함에 따라 그의 고향에 창건되었다. 영당의 건립은 정규한이 생전 화산 아래에 화산정사(華山精舍)를 짓고 학문을 가르친 데서 비롯되었다. 영당이 건립된 후에는 1835년 묘비 건립, 1858년 사헌부지평 증직 등 일련의 추숭 활동이 이어졌다. 영당은 건립 후 40여 년이 지난 1871년 1차 중수, 1931년 2차 중수, 1953년과 1961년 재차 중수되었고, 1962년 후손들에 의해 화산영당의 명칭이 화산사(華山祠)로 개칭되었다. 안타깝게도 정규한의 영정이 1970년대 초 도난당해 현재는 위패로 대신하여 모시고 있다. 사당의 뒤편에는 그의 묘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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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한은 공주를 대표하는 학자로 1780년(정조 4)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성리학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또한, 정규한은 문장가로도 이름을 날렸는데 몇 가지 일화가 전해진다. 1790년(정조 14) 성균관시에서 정조가 직접 정국의 상황과 계책을 묻는 질문을 하였는데, 당시 정규한의 대답이 가장 돋보였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1795년(정조 19) 유생들의 글을 평가하는 자리에서도 고시(古詩) 부분 중 으뜸으로 꼽혀 왕으로부터 직접 『주자백선』을 하사받았다. 그의 저서로는 <화산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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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산백과 ‘화산영당’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97842&cid=40942&categoryId=37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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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화산영당’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31,00690000,34&pageNo=1_1_1_0
  
  

2021년 4월 23일 (금) 13:12 판


화산영당
화산영당,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화산영당
한자 華山影堂
주소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만가리길 14
지정번호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69호
지정일 1984년 5월 17일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사우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화산영당,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정규한(鄭奎漢, 1750~1824)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제자와 유생들이 순조 32년(1832)에 세운 사당이다.

정규한은 조선 후기의 학자이며 호는 화산(華山) 또는 운수산인(雲水山人)이다. 정조 4년(1780)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성리학 연구에 열중하였다.

산수와 자연을 좋아하고 시문을 즐겨 문장가로도 유명하였으며 저서로는 <화산집>이 있다. 사당 뒤쪽에 묘소가 있다.

유림들은 1962년 사당을 중수하면서 화산영당의 명칭을 화산사(華山祠)로 개칭하였다.


수정 국문

초고

영당은 영정(影幀)을 모셔 둔 사당이다. 계룡면 화은리에 위치한 화산영당은 조선후기 공주를 대표하는 문장가 정규한(鄭奎漢, 1750~1824)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1832년(순조 32)에 건립된 사당으로, 정규한의 자인 화산(華山)에서 이름 붙여졌다.

정규한의 영당은 그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도학을 숭모하였던 지역 사림들이 청원함에 따라 그의 고향에 창건되었다. 영당의 건립은 정규한이 생전 화산 아래에 화산정사(華山精舍)를 짓고 학문을 가르친 데서 비롯되었다. 영당이 건립된 후에는 1835년 묘비 건립, 1858년 사헌부지평 증직 등 일련의 추숭 활동이 이어졌다. 영당은 건립 후 40여 년이 지난 1871년 1차 중수, 1931년 2차 중수, 1953년과 1961년 재차 중수되었고, 1962년 후손들에 의해 화산영당의 명칭이 화산사(華山祠)로 개칭되었다. 안타깝게도 정규한의 영정이 1970년대 초 도난당해 현재는 위패로 대신하여 모시고 있다. 사당의 뒤편에는 그의 묘소가 있다.

정규한은 공주를 대표하는 학자로 1780년(정조 4)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성리학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또한, 정규한은 문장가로도 이름을 날렸는데 몇 가지 일화가 전해진다. 1790년(정조 14) 성균관시에서 정조가 직접 정국의 상황과 계책을 묻는 질문을 하였는데, 당시 정규한의 대답이 가장 돋보였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1795년(정조 19) 유생들의 글을 평가하는 자리에서도 고시(古詩) 부분 중 으뜸으로 꼽혀 왕으로부터 직접 『주자백선』을 하사받았다. 그의 저서로는 <화산집>이 있다.

1차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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